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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pr 29. 2021

엄마는...

 엄마와 길을 걸었다. 딸아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그래서인지 요즘 엄청 이쁘게 꾸미고 다닌다고 하자 엄마가 너무 좋아했다. 마침 저 멀리 버스를 쫒아 뛰는 딸아이를 만났다. 이쁘게 입은 딸아이는 버스를 놓친 대신 나와 할머니를 만나 셋이 함께 걸었다, 예전처럼. 엄마는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집까지 걸어가려고?" 내가 물었더니 엄마는 살짝 풀이 죽었다. "아니, 힘들어서 집까지는 못 걸어가." 나는 끄덕끄덕했다. 하긴, 운동삼아 걸으려면 모를까 좀 힘들지. 엄마는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얼른 주머니를 뒤져 엄마에게 천 원짜리 4장을 건넸다. 마침 주머니에 지폐가 있었네. 다시 뒤지니 한 장이 더 나왔다. 혹시 모자랄지도 모르니까 이거도 가져가. 그렇게 엄마에게 5천 원을 건넸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이었구나. 참 생생하고, 행복했는데 그만, 꿈이었구나.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엄마, 택시 타고 집에 잘 갔어?"


 엄마는 알뜰했다. 일생 가계부를 썼고, 식재료 병마다 이름을 써서 견출지를 붙여두었다. 네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내 집엔 엄마네서 가져온 것들이 더러 남아있다.  가져와 아직 다쓰지도 못한 랩들, 스텐냄비를 반짝이게 해 준다고 익숙한 엄마 글씨로 설명을 써붙여둔 세제도 있다. 

 일생 돈을 아끼고, 모으고, 불리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았던 우리 엄마. 문득문득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자린고비처럼 살았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여행도 좀 더 하고 자신에게 돈을 좀 더 쓰면서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도 은행일은 꼭 본인이 직접 가고 싶어 했던 엄마였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알 것도 같다. 사실 '나의 기쁨'이라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기쁨이고 즐거움인 것의 기준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그러니 다른 이가 보았을 때 기쁠 리가 있겠나 싶은 것이 나에겐 기쁨 일수 있으며, 다른 이가 고개 저을 때 나는 그것이 너무 만족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겐 여행이나 적당한 사치가 기쁨일 수도 있는 것처럼, 엄마에겐 돈을 모으고 살림을 키우는 것이 낙이고 취미였을 수 있다.

 어려서 엄마에게 선물을 하면 대부분은 좋아하지 않았다. 돈 아깝게 쓰지도 않을 이런 걸 뭐하러 샀냐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돈으로 줘! 농담인지 진담인지 늘 하는 말이었다. 선물을 하는 사람은 대가성 상납이면 모를까 의무감에서만 선물을 하지는 않는다. 선물을 하는 사람에게도 기쁨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고르는 기쁨, 받은 이의 반응을 상상하는 기쁨 말이다. 엄마는 대부분 '돈 아깝게'라는 반응이었으므로 신나게 선물을 골라서 내밀었다가 속으로 서운해하며 마음을 접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봉투를 내밀게 되었다. 거듭하다 보니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받는 이가 좋아하는 선물이라면, 그것이 현금이어도 준비하는 즐거움은 있으니 말이다.

 엄마에게 마지막 건넨 선물도 '현금'이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필요한 것은 없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없었고, 내가 매일 들여다보았으니 돈 역시 병원에서 쓸 일이 있을 리 없었지만 환자복에 비상금을 넣고 있어야 마음 편해했다. 현금봉투를 주었더니 엄마가 힘없이 웃었다. " 엄마 돈 좋아한다고~"


 잠에서 깨어 한동안 그대로 누워있었다. 지나간 것들이, 언제까지고 생생 할리는 없겠지만 아직은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이런저런 장면들을 떠올리고, 잠깐 혼자 웃다가, 또 잠깐 눈에 물기가 어렸다가 , 이내 파도처럼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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