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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30. 2021

쌍둥이가 되어가는 시간

  몇 해 전, 쌍둥이가 학원에 왔다. 일란성쌍둥이라고 했다. 머리를 밤톨처럼 짧게 깎은 중학생이었는데 둘이 닮아도 너무 닮아서, 말 그대로 데칼코마니 같았다. 개구쟁이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녀석들은 이미 집에서도 세면대를 몇 번 부숴본 적 있는 말썽꾼들이었다. 같이 수업하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사람 알아보는 눈이 젬병인 나는 더더욱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해 한동안 애를 먹었다. 

 얘구나, 하면 쟤였다. 쟤인가 보다 하면 또 얘였다. 서로 교재를 바꿔 내놓아도 얼굴 구분이 되지 않으므로 매번 속았다. 어느 날 진지하게 물어봤다. "너희 부모님은 헷갈리지 않고 구분하시니? 한 번도 속으신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아이들은 웃었다.

 몇 달이 지났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더 이상 속을 일이 없었다. 이제 쌍둥이는, 쌍둥이가 아니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다른 얼굴이었다. 새로 수업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신기해했다. "쟤들 저렇게 판박이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구분하세요? " 그때 내 대답은 이랬다. " 아니야! 쟤들, 얼굴이 완전히 달라." 정말 두 아이들은 비슷할 뿐 다른 얼굴이어서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몇 달만 파트쌤으로 다시 수업을 맡은 고3 쌍둥이는 이란성이라고 했다. 수포자이지만 전기과는 가고 싶다는 그들이 중학생이던 때에 처음 보았다. 그저 친구사이인 줄 알 정도로 너무 닮지 않아서 도저히 쌍둥이로 믿기지 않았다. '형제도 아니고, 쌍둥이인데 이렇게 다르다고? 이란성이란 그런 건가?'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나자 그 둘은 점점 신기하게 닮아갔다. 누가 봐도 친구가 아니라 똑같이 닮은 형제였다.

 

 원인은 '시간'이 분명하다. 

 쌍둥이라고 해도 엄연히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하나로는 소용없는 젓가락 같은 한 세트가 아닌 것이다. 시간을 함께 보내고, 눈을 맞춘다.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는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나에게 쌍둥이는 더 이상 같지 않다. 그들은 별개의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니 말이다. 

 예전 텔레비전에서 쌍둥이 부부가 나와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서로의 배우자가 헷갈려본 적은 없는가, 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미묘한 질문이긴 했는데 두 아내는 너무도 당연하게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다고 했다. 일란성쌍둥이와 몇 달을 보낸 후 그녀들의 대답을 이해했다. 그러니 낳은 부모가 헷갈릴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이란성쌍둥이가 점점 똑같아져 보이는 것 역시 '시간'이 원인이다. 

 함께 수업하던 아이들 모두 그들이 쌍둥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역시 쌍둥이였다. 모든 것이 한쌍처럼 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해의 공백이 있은 이후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엔 심지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웃는 눈매도, 웃음소리도, 민망하면 나오는 말투도 여전히 똑같았다. 그들은 쌍둥이였으니 말이다.


 함께 한 시간이 쌓인다. 그만큼의 눈길이 닿고, 눈길이 닿은 만큼 애정이 담긴다. 그런 시간들이 모이고 나면 이처럼 무언가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주는 것 같다. 분간할 수 없던 일란성쌍둥이는 너무나 확실한 하나씩으로, 닮은 데가 없어 보이던 이란성쌍둥이는 '역시나 쌍둥이였어!' 하는 순간으로 같아 보이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쉼없이 시간이 쌓인다. 촘촘하고, 견고하게 쌓아 올리면 아마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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