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Jul 24. 2021

감성 농부의 옥수수

   일면식이 없는 친구의 오빠는 오랜 경찰관 생활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다고 했다. 말이 농부지 내다 파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식구들 먹고 주변에 나눠줄 만큼의 농사만 지으신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사교성이 없다는 친구의 오빠는 애써 지은 농작물들을 포장해 일가친척들에게 택배로 보내기도 하고, 근처 어르신 댁에 무심하게 놓고 가기도 하신다고 했다.

   친구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친구 오빠의 이미지는 어쩐지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는 '감성 농부'였다. 물론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니 실제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친구의 말 중에 오빠가 예민하고 감성적이라는 소리는 없었던 듯한데 순전히 내가 만들어낸 허상의 이미지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음식이라고는 거의 완제품만 들이는 집에 지인이 풋고추를 보내왔는데 소진할 방법이 없었다. 감성 농부인 오빠를 둔 친구네 집에 푸성귀가 없을 리가 있나 하면서도 연락을 했다. 역시 친구는 고추가 있었지만 마침 서산 본가에 와있다며 옥수수를 가지고 들르겠다고 했다. 있는 고추를 나눠주려다 옥수수를 얻어먹는 꼴이 되었다.

    내 상상 속의 '감성 농부'인 친구 오빠가 키운 옥수수를 가지고 친구가 집에 들렀다. 친구가 가져온 옥수수는 알이 탱글탱글했다. 마침 올라오기 전 내 연락을 받았기에, 오빠가 한 봉지 담아주셨다는 옥수수를 챙겨 왔는데 꺼내보니 그 양이 한 봉지 분량이 아니었다. 내 요리 수준을 아는  친구는 옥수수 삶는 법을 세세히 설명하고 돌아갔다. 이파리를 떼지 말고 같이 삶을 것. 물에 풍덩 넣고 푹푹 삶을 것. 감미료는 전혀 넣지 말 것.


   나는 사실 옥수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먹는 것에 그리 까탈스러운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식에 손을 대어 먹는 것만큼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고기를 사랑하는 육식주의자이지만 쌈은 잘 먹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식구들은 옥수수를 좋아하지만 딱히 자주 사지도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이고, 어쨌거나 쇼핑은 사는 사람 맘이라고 우긴다.

   친구가 놓고 간 제법 많은 옥수수를 지퍼백에 넣다가 세 개를 꺼내어 삶았다. 이파리도 함께, 감미료는 넣지 않고, 물에 푹푹 삶았다. 건져낸 옥수수는 날 것이었을 때보다 더 탱글탱글해지고 매끄럽게 윤기가 나는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한입 하모니카 불듯 베어 먹었는데, 아... 달고 쫀득쫀득한 식감이라니. 친구가 감미료를 넣지 말라고 이야기한 이유를 알았다. 앉은자리에서 옥수수 세 개 중 두 개를 먹어치우고, 나머지 하나는 출근하는 딸아이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또 세 개를 더 삶았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것이었던가.

   

   내 주변 또래들은 아직 현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일생 돈 되는 일을 했으니, 이제 돈이 벌리지 않아도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에겐 글을 쓰는 일이었다. 글로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딱히 글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글을 쓰는 일은 물가에 앉아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강물에 배를 띄워 노를 젓는 일이다. 

      친구는 안정된 공무원을 그만두고 심심풀이로 농사를 짓겠다는 오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워낙 말수가 적어 속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친구를 삼십 년도 훨씬 넘게 알아왔으나 그의 형제들까지 아는 것은 아니다. 친구는 그런 것 같지도 않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아무래도 친구의 오빠는 농사일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농촌에서 자라면서도 농사일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라 했지만 이것저것 애써 심고 가꾸고, 땀 흘려 거둬들여서 주변에 나눠주는 즐거움을 알게 된 사람 말이다. 

   물론 그저 소일거리로 즐기는 취미 농부일 수도, 작물이 자라는 밭을 평온한 눈길로 바라보는 진짜 감성 농부일 수도, 아니면 힘들여 거둔 수확물들을 여기저기 나눠주며 행복해하는 오지랖 농부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간에 친구 오빠는 즐거운 농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감성 농부의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것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11월, 접는 분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