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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Oct 02. 2021

나도 가보았지, 다방

다방 기행문 - 유성용

1.

"한마디로 다방은 배울 게 별로 없는 곳이다. 물론 커피도 맛없고. 하지만 그곳은 어쩌면 사라져 가는 것들과 버려진 것들의 풍경을 따라가는 이정표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만나볼 수 있는 그런 다방은 이제 거의 없다. 사라지는 것들은 대개 스스로도 제 기억을 잃는 법이다."      


스쿠터를 타고 다녀온 전국의 다방들은 남루하고 초라했으나, 그의 글은 따뜻하고 유쾌하다. 물론 때로는 쓸쓸하기도 하다. 그것은 사양길에 접어든, 아니 이미 대부분 그리된 업종인 다방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그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다방과 함께 엮인 추억 때문이었을까. 그러므로 이 글은 다방기행문이지만, 동시에 다방기행문이 아니기도 하다.

작가의 주변 사람들을 그를 '여행생활자'라 부른다고 했다. 목적지 따위는 없이, 이어지는 길과 그 여정을 함께 그려보다 보면 맞는 표현인 듯하다.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역시 그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듯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행이 생활이 된다면, 그래도 그것이 여행일까 생각해보게된다. 낡고 오래된, 그래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순간이 더러 있다.

도시에서 다방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업종이 되었다. 주변에 다방이 어디 있더라 하고 찾아봤는데 정말 없다. 요즘은 시골에 가도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들어선 세월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글은 스스로 제 기억을 잃으며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일일수도 있겠다. 거창하게 기록한다 이야기하지 않으며, 적당히 따뜻한 느낌의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는 기분이다.     


2.

"어쩌면 이 세상살이가 강변 모래톱에 집 짓는 일이다. 우리는 터미널 앞 강변 다방에서 그렇게 만났다. 다방 창문 너머에 있다는 강은 깜깜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담에게 물으니 저건 분명 강이란다. 나는 뵈지도 않는 검은 강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나도 모를 약속을 하나 하고 있었다. h. 내가 끝까지 당신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세상에 날리던 냉소는 다 어디 가고 나는 어쩌다 이런 따뜻한 사람이 되었을까."     


가끔 살다 보면 종종, 그곳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보이지 않아도 믿으며 그것에 거는 약속을 하는 일도, 살다 보면 역시 있다. 그곳에 정말 강이 흐르고 있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세상살이가 강변 모래톱에 집을 짓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와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지만  흐르고 있다는 강을 내려다보며 그는 약속을 한다. 작가가 찾았던 그  강변 다방엘 간다면, 나 역시 따뜻한 약속 하나쯤은 할 수 있을까.     


3.

"나로 한평생을 살다가 나를 두고 떠나는 풍경이 진안에 있다. 길을 제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그 길이 나의 것이 되지 않듯이 제아무리 전전긍긍 살아도 인생은 결코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그 길에서 사라질 때처럼 그저 사라질 날이 오거나 할 것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올해도 제멋대로 허무하지 말고, 모른 척 열심히 나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내가 아니게 될 때까지."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전전긍긍, 나도 그랬다. 길에 보이는 풍경보다는 길가에 무엇이 있는가를 먼저 확인했었다. 아직도 오롯이 길의 풍경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욕심내고 다그쳐도 인생이 결코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역시 쉽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있고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없던 용기가 샘솟지는 않는다. 모자란 지혜가 갑자기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저 사라지겠지만 모른 척 열심히 나로 사는 일은 성실히 계속 잘해볼 생각이다.     


4.

"그간 스쿠터로 전국의 다방들을 헤집고 다닐 때 느낀 게 있다면 오라는 곳보다 굳이 오라고 소리하지 않는 곳이 오히려 가볼 만하다는 것이다. 오라고 하는 곳들은 대개 '늪'이다. 무슨 복고 취향이 있어서 다방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오라는 곳들을 가보면 하나같이 가짜 자연이고 테마 공원처럼 따분해서 그곳을 피하다 보니 기울어져가는 오래된 마을이 있고 그 사이사이 다방이 있고 그랬다. 어쩌면 할 말은 이것뿐이지도 모르겠다. 다 사라지기 전에 나는 스쿠터에 단봇짐 싣고 세상 끝에서 나풀거리는 몇몇 다방을 다녀왔다오."     


여러 해 전에 나 역시도, '진짜 다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지리산 밑자락이었다. 친구와 둘이 겁도 없이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가 벽소령대피소에서 하루 묵고 종주로를 벗어났다. 기나긴 임도를 걸어 도착한 마을에서 하루에 몇 번 안 다닌다는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작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시간이 남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터미널 위층의 다방에 들어갔다. 촌스러운 진한 보라색 소파 앞의 테이블마다 설탕, 프림이 들어있는 작은 단지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주문을 받더니 초로의 다방 마담이 우리에게 말했다. "서울에서 왔나 봐?"

마담이 가져다준 달고도 진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소곤소곤했다. "여기 진짜 드라마에 나오는 다방 같아."

당연하다.  거기는 진짜 '다방'이었으니 말이다.

책장을 덮으며 이제는 연락이 소원해진 그 친구를 떠올렸다. 우리 다시 언젠가, 낡고 눅눅한 시골 다방의 낡은 소파에 함께 마주 앉을 날이 올까. 몸서리쳐질 만큼  달디 단 다방커피 한잔을 마시며 집에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던 그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그 다방에서 우리는 참 멀리 와 있다.




* 이 글은 2W매거진 16호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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