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집에서 낳느라 근수를 안 달아봐서 그렇지, 아마 4킬로는 넘었을 거야.”
엄마가 늘 말하던 대로 나는 타고나길 우량아였다. “포동포동하니 귀엽다.”라는 소리는 자라면서 종종 들었다. (하긴, 어릴 때 내 사진을 보면 그 외엔 달리 인사로 건넬 만한 미사여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 큰 처자가 된 다음에 들었던 말은 “시집가려면 살 좀 빼야 하지 않겠어? ”라는 어른들의 잔소리였다. (다들 남의 집 딸내미 혼사엔 왜 그리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도 저도 모두 지난 이 나이쯤 되면 안 들을 줄 알았던 살에 관한 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들린다. “건강을 위해서 빼야 한다”라는 것은 애교 수준의 오지랖이고, “그래도 살집이 있으니 주름살이 잘 안 보이는구나”라는 칭찬인지 험담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들도 더러 듣는다.
다이어트를 작심하고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시도는 늘 한다. 이게 문제다. 늘 시도를 한다는 것은, 곧 늘 실패하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내 인생 첫 다이어트는 대학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 동안 사과만 먹겠다고 맘먹었다. 몇 킬로쯤 빠졌으나 사람은 계속 사과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 당연히 도로 쪘다. 핑곗김에 사과만 물리도록 먹어 치우고 다이어트는 때려치웠다.
시집가려면 살 좀 빼야 한다는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캠퍼스커플로 5년간 연애하고 결혼도 했다. 신랑은 178센티의 키에 53킬로의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몸매의 소유자였다. 엄마 친구들은 두고두고 엄마에게 말했다. “얘! 너희 사위가 신랑 입장하는데 어찌나 말랐는지 바짓가랑이만 펄럭이더라.”
그러니 옆에 선 나는 상대적으로 더 기골 장대해 보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엄마는 친구 딸이 수지침으로 살을 뺐다며 나에게도 권했다. 솔깃해진 나는 며칠 후, 양 손바닥과 손등에 온통 고슴도치처럼 수지침 수백 개를 달고 앉아있었다.
“배고픈 걸 못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수지침 선생님은 말했지만, 배는 늘 고팠다. 맹세하건대, 소도 때려잡게 생긴 비주얼과 달리
나는 대식가가 아니다. 심지어 식당에서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다. (근데 대체 왜 찌고, 왜
안 빠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늘 배는 고팠지만, 매달 수지침 선생님에게 갖다 바친 돈이 아깝고, 또 같은 선생님에게 수지침을 맞고 반쪽 몸매가 되었다는 엄마 친구 딸(엄친딸이로구나)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쓸데없는 전투 의욕이 샘솟기도 했다. 결국 어찌어찌 10킬로를 빼게 되었다.
하지만 사과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듯, 날이면 날마다 양 손에 수지침 수백 개를 달고 배고픔을 참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야금야금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살과의 전쟁이었다. 늘 전투의지는 불타올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막상 가열찬 전투는 벌이지도 못한 채 진격의 나팔과 함께 바로 백기 투항이었다. 백기 투항의 이유는 참으로 다양했다.
‘또 시집갈 것도 아닌데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고!’였던 날도 있고, ‘누가 기준을 정하는 거야? 자기 편한 대로 살면 되지.’라며 호기롭게 백기를 던진 날도 있었다. 아니면 ‘나에겐 아직 열두 벌의 고무줄 바지가 있다’라며 비장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다이어트는 진즉에 포기했고, 살과의 전쟁에선 백기를 늘 들고 있지만, 오늘도 나는 외친다.
“나 진짜 이번엔 살 뺀다! 무조건 내년 여름엔 수영복 입을 거야.”
하지만 외치는 나도, 듣는 사람도 아무도 믿지 않는 이 말은 그저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것이고, 수영복은 내년 여름부터 입는 것이다. 내년 여름에도 올여름과 마찬가지로 수영복을 입지는 못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수영복 따위가 대수겠는가.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즐거운 물놀이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오래전엔 참 맘에 드는 이런 표어가 있었다고 한다. “우량아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 우량아가 아니라 개구쟁이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