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시작이라고 했다. 요즈음의 장마라는 것은 날이면 날마다 비가 내리는 것보다는 국지성 호우로 와르르 쏟아지고 나선, 한동안 우중충하고 습하다가 다시 폭우가 내리는 일의 반복이 잦았다. 누구는 기후변화를 이야기했고, 누구는 아열대성 기후로 변화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센티해지는 시간이지만, 막상 나가서 빗속을 다녀야 할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문 안과 밖이 이렇게도 다른 것이다. 사는 일처럼 말이다.
비가 잠시 그친 사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러운 폭우를 만났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쏟아진다고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새로 빨아 며칠 신지 않은 운동화가 젖었고, 바지가 젖었다. 급기야 우산 속에서도 비가 내렸다. 그쯤 되자 더는 빗줄기를 조심할 생각이 들지 않아 첨벙첨벙 빗물 웅덩이를 밟으며 걸었고, 우산 밖 세찬 빗줄기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집에 들어왔을 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을 신나게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고등학교 때 한 반이었던 친구는 성이 양 씨여서 별명이 양양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비가 왔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양양과 나는 우산이 없었고, 함께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 흰 블라우스를 입은 양양은 비에 젖어 자꾸 달라붙는 블라우스를 어깨에서 떼어내는 데 온 신경을 썼다. 나는 이왕 젖은 김에 첨벙첨벙 흙탕물을 밟고 걸었다. 우리는 빗물에 온몸이 젖었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양양은 어깨로 계속 손을 가져가면서도 웃었다. 그때 우리는 별것이 다 즐거운 열일곱이었다.
우리 집이 더 가까웠으므로 양양과 함께 들어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옷의 물기를 닦았다. 엄마는 양양과 나에게 바나나를 내어주었다. 양양이 말했다.
“우와! 집에 바나나를 쌓아놓고 먹다니, 진짜 좋겠다! 부러워.”
엄마도 나도 양양의 그 천진난만한 말에 웃었다.
바나나를 상자째로 놓고 간 것은 삼촌이었다. 바나나를 들여와 후숙하는 공장과 과일 도매상을 했던 삼촌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 시절 바나나를 상자째 놓고 먹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바나나는 지금처럼 흔하디흔한 과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바나나를 한 상자씩 놓고 갔어도 삼촌은 부모님에겐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였다. 아빠의 형제였지만, 운영하는 일은 잘 풀리지 않았으므로 종종 껄끄러운 소리가 오가기도 했다. 부모님과 삼촌의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삼촌이 좋았다. 주먹만 한 알밤을 한 상자씩 갖다주지 않아도, 그 비싼 바나나를 통째로 놓고 가지 않아도 말이다.
운전을 하고 다니므로 비가 오는 날 크게 젖을 일은 없다. 그러나 가끔 비 오는 날이면 문득 지난 일의 조각들을 생각하게 된다.
젖은 블라우스를 자꾸 어깨에서 떼어내던 양양은 이제 소식이 끊겼으므로 이 빗속에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다. 비가 내릴때면 양양도 함께 비를 맞고 나서 바나나를 나눠 먹었던 그 날을 생각할까.
비에 젖어 돌아온 양양과 내가 먹었던 그 바나나를 상자째로 갖다주고 간 삼촌 역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어느 과수원에 있다더라, 바람결에 들려온 소식도 이십 년이 넘은 이야기다. 그 사이 삼촌의 주민등록은 말소되고, 세상 서류에서 삼촌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그저 사라졌다.
비에 젖은 몸과 머리를 모두 씻고 나와 창밖을 한참 보았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심히 보다가 오래전 비를 맞고 돌아온 날을 이렇게 떠올려본다. 맑은 날 잊고 있던 추억이, 상념이 비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