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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08. 2022

작게, 그러나 진심을 나누는 일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 몇이 모인 편한 모임이 있다. 한 친구의 아버지가 코로나로 돌아가셔서 각 십만 원씩 조의금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 하나가 지난번 자신의 딸 결혼식에 칠만 원씩을 했던 일을 서운해했다.

경사와 애사, 그리고 부모님의 상과 자식의 혼사여서 다소 차등을 두게 되었다고 회장의 전체공지가 떴다. 앞으로도 우리 모임의 경사와 애사는 이번 경우를 지표로 삼기로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친구는 알겠다고 하였으나 아마 내내 서운할 것이다. 나는 친구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요즘 인터넷에서 축의금이나 조의금 문제로 적네 마네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있구나 싶었다.     


스몰웨딩이야기가 많은 시대이다. 결혼식이라면 오래전부터 사방에 청첩장을 돌리고, 식을 치르는 날 행여라도 손님이 적을까 봐 걱정하고, 축의금액을 누가 얼마 했는지 따져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결혼을 시키지 않은 딸아이가 하나 있다. 자식의 인생이니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그 아이의 몫이다. 다만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스몰웨딩을 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내가 생각하는 스몰웨딩이란 이러하다. 한쪽 하객이 오십 명을 넘지 않을 것, 그리고 축의금을 절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날 하객을 접대한다는 의미라면 굳이 축의금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다. 나의 경사에 관심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도 안 보고 살 리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보다 나의 경사나 애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스몰웨딩과 마찬가지로 나는 스몰장례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방에 부고를 뿌리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 가족의, 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그리 필요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내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러니 장례식에는 정말로 이를 궁금해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만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조의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나와 내 가족의 경사와 애사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다고 해서 다른 이의 경사와 애사에 마음을 봉투로 표현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간혹 경사와 애사가 끝난 후에 나 몰라라 하는 경우엔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몇 년간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가 먼저 연락해서 자식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막상 혼사가 끝난 후엔 다시 연락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큰일을 치르고 시간을 내어 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담은 봉투를 건넨 이들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없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단체 문자 한 줄은 그나마 낫다. 그 짧은 인사한 줄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그들에게는 마치 내가 주었던 것을 되돌려받은 것이라는 당당한 계산이 느껴져 삭막하기도 했다.     


나의 스몰웨딩과 스몰장례식의 생각을 들을 사람들이 말했다. 다들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실천이 힘든 이유는 그간 여기저기 낸 봉투 때문이기도 하다, 라고 말이다. 누군가 그 고리를 끊는다면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으니 나는 하객을 많이 부르고 성대한 혼사를 치르고 싶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나처럼 소소한 경조사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 어떤 것이든 각자의 생각대로 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할 듯하다. 스몰웨딩이나 스몰장례식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작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의무감에서, 빚을 갚는 마음으로 봉투를 건네고 얼굴도장을 찍고 헤어진다고 해서 서로의 뒷모습이 오래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작게, 그러나 많은 마음을 나누는 일을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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