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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25. 2022

나는야 필사여신


“필사 여신님!”이라는 말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여신이 흔한 시대이지만 막상 여신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게다가 필사 여신이라니.

나를 필사 여신이라고 한 사람은 필사스터디의 그룹장이었다. 그녀는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며 알게 되었는데 과연 몸이 몇 개인가 싶을 정도로 하는 일이 많았다. 직장생활을 했고,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주부였고, 도서관 강좌를 여러 개 들었고, 글쓰기 모임도 한 개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시민주도강좌도 개설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필사스터디까지 시작했다. 그 에너지가 놀라울 뿐이었다.     


필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오픈채팅방을 열고, 비용을 받는 것도 아니니 돈이 될 것도 아닌 그 일련의 일들을 참 즐겁고 열정적으로 해냈다. 그녀를 보면서 가끔 생각했다. 나의 그시절에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아이가 어려서, 일이 바빠서’라는 것은 모두 핑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젊은 날을 좀 더 치열하게 보내지 못했던 것은 그 이유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의 게으름, 나의 태만. 결국 모든 것의 시작이 나였던 것처럼, 그 이유도 나였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책은 읽는 것인데 굳이 베껴 쓸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도 그 필사라는 것을 해보기로 맘먹은 것은 꼭 문학작품이 아니어도 괜찮으며, 매일 인증만 한다면 그 무엇을 어느만큼 필사하든 관계없다는 자유로운 조건 때문이기도 했다. 

그다지 성실한 종교인은 결코 아니지만 천주교인으로서 성경을 통독해본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은 좀 부끄럽기도 한 일이던 차였다. 이참에 성경필사에 도전했다. 나름 정한 기준으로 매일 한 페이지씩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겁 없이 시작을 했으나 습자지처럼 얇디얇은 성경을 모두 필사해내려면 대체 얼마나 걸리려는지 싶었다. 


처음엔 잊지 않게 매일 필사하고 사진을 찍어 오픈채팅방에 올려 인증하는 일이 번거롭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이십여 일쯤 필사에 참여했다. 더러 빼먹기도 했던 필사가 뒤로 갈수록 성실해지기 시작한 것은 의외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상에 앉아 책을 펴고 한 페이지를 필사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잠이 덜 깬 멍한 기분을 모닝커피 한잔으로 깨우며 사각사각 수성펜이 노트 위를 움직이는 그 촉감을 즐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스터디가 시작되고 나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언니네 집에서 묵는 한 달 넘는  기간의 짐속에 필사노트를 챙겨 넣었다. 과연 여행지에서도 매일 필사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한번 몸에 밴 습관은 이어졌다. 내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었다. 저절로 새벽에 눈이 떠졌다. 집에서처럼 모닝커피 한잔으로 덜 깬 잠을 마저 깨우며 미국의 아침도 늘 필사로 시작했다. 그 덕에 두 번째 필사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완주했다. 나 자신도 신기하고 대견한 경험이었다.      


세 번째 필사스터디가 시작되었다. 이제 ‘필사 여신’이 된 나는 더는 목표를 ‘완주’로 잡지 않는다. ‘인증’이 목표인 것도 아니다. 이제야 진정한 필사의 맛을 알아가는 기분이다. 필사란 눈으로 보고 지나가는 문장을 잡아두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처럼 휙 지나갈 것을 구름처럼 천천히 흐르게 해준다. 눈으로 담고, 손으로 쓰고, 사각 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로 다시 한번 듣는다. 

이러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나는 필사 여신이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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