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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21. 2022

풋고추를 썰 때

                             

퇴근하는 남편 손에 들린 것은 두 봉지 가득한 풋고추였다. 크고 작고, 가늘고 통통하고 제멋대로인 풋고추는 한눈에 보기에도 싱싱해 보였다. 지인이 귀농을 해서 직접 무농약으로 키워 수확한 것이라고 했다. 

“대단하다!”

남편은 집 앞에 편의점이 즐비해야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는 개나 소나 키울 수 있다는 스투키 따위의 쉬운 식물이 아니면 화분에서 죄다 죽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고 자란 곳도 아닌 농촌으로 들어가 뒤늦게 직접 고추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풋고추는 꺼내놓고 보니 꽤 많았다. 일단 씻고 있는데 강아지 루비가 덤비기 시작했다. 루비는 고추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강아지와 함께 살았지만, 대부분 개는 채소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고추라니. 희한하게도 루비는 오이고추를 하나 던져주면 꼭지만 남기고 야무지게 뜯어먹었다. 어느 날은 맵지 않은 풋고추를 줘봤다. 역시 맛있게 뜯어먹었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풋고추를 먹는 것을 보고 식구들이 다 함께 웃었다. 

꼭지를 따보고 매운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골라 한 개를 주었다. 기다란 풋고추를 물고,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풋고추를 씻고 다듬다 보니 맵지 않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속담이 속담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있는 것이다. 맵지 않다고 생각한 처음과 달리 작은 고추는 꽤 매운 냄새가 났다.

요리엔 젬병인 사람이 나다. 풋고추를 씻어놓고 잠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풋고추라면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어떤 요리가 있으려나. 두어 가지 풋고추 요리가 검색되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결국 썰어서 냉동해두고 찌개나 국에 조금씩 매콤한 양념으로 넣어 먹기로 맘을 먹고 두 봉지의 풋고추를 모두 썰었다.


다 썰어갈 즈음에 고추의 매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콜록콜록 기침하며 풋고추를 마저 썰고, 나눠서 냉동고에 넣고 손을 씻은 다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칼을 쥐었던 오른손은 덜했지만, 풋고추를 맨손으로 잡았던 왼손바닥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어, 왜 이러지. 마늘 껍질을 깐 것도 아니고 그저 풋고추를 써느라 잡고 있었을 뿐인데.’     

조금 그러다 말겠거니 했던 화끈거림은 밤새 이어졌다. 손바닥이 붉어지더니 쓰리고 화끈거림이 심해졌다. 더운물에 담가봤다가 냉찜질이 나으려나 싶어 얼음주머니에 밤새 손을 넣고 있기도 했다.

궁금한 마음에 검색해보니 그것은 일종의 화학적 화상이라고 했다. 캡사이신 화상이라고, 심하면 화상연고를 바르고 약을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손바닥의 화끈거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만 하루를 넘기고서였다. 평소에 요리재료를 다루는 일이 거의 없이 완제품을 사다 먹는 티를 톡톡히 냈다.     


얼음주머니에 손을 담그고 있는 밤에 문득 생각했다. 어린 시절 엄마나 할머니는 고무장갑을 끼고 일하는 것을 못 보았다. 늘 맨손으로 붉은 고춧가루를 버무려 김치를 담그고, 빨간 고추장을 비벼서 국수를 뚝딱 한 그릇 해주시곤 했다. 설거지도, 빨래도, 음식도 모두 그렇게 맨손으로 하고 심지어 뜨거운 냄비도 척척 잡았다. 가끔 내 손을 만지며 엄마가 웃었다.

“아이고, 이 손 예쁜 것 좀 봐라. 나도 이랬는데 이제 손이 이렇게 되었네.”

나도 나이가 더 먹고 난 어느 날쯤엔 딸아이의 희고 고운 손을 만지며 엄마처럼 그렇게 얘기할 날도 있으려나. 냉동해둔 풋고추를 몇 조각씩 꺼내어 먹는 날이면, 손바닥의 화끈거림과 함께 어쩐지 엄마의 거칠고 투박한 손도 함께 떠오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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