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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06. 2022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Hodie Mihi Cras Tibi." 


고요 속에 잠긴 대구의 성직자 묘역 입구엔 이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묘역만큼이나 생소한 그 낯선 언어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읽을 수 없는 그 라틴어는 나에게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 뜻은 안내 책자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이것은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라는 성경 글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이름 모를 묘지를 만났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소박하고 작은 그곳들은 불쑥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오래된 교회의 마당 옆에 낡은 묘비석 몇 개로 있기도 했고, 작은 마을의 한구석 나무 그늘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곳도 있었다. 외국뿐 아니었다. 제주에선 돌로 경계를 두른 무덤들이 오름이나 밭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바람 속에 엎드려 있는 풍경을 흔하게 보았다. 


그 어느 곳에서든, 그 누가 누워있든 묘지를 보는 일은 어쩐지 남달랐다. 풍경을 내다보는 유리창인가 싶으면 거울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이면서 또한 나의 책이기도 했다. 누구 하나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지만, 나에게 죽음이 올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 또한 드물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랬기에 죽음은 늘 삼인칭의 서사였다.      


나는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종종 간다. 드넓은 땅에, 그렇게나 많은 죽음을 본다. 가만히 선 채 누군가의 생몰 연도가 표시된 비석을 한참 보곤 한다.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죽었을 당시 그의 계급, 그리고 죽으며 남긴 가족의 이름 같은 몇 단어로 그들의 인생 서사가 압축되어 있었다. 가끔 달이 밝은 밤이면 고요에 잠긴 채 달빛 아래 묘비석들이 희게 빛나는 그곳의 밤 풍경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곳엔 내 가족들이 있다.     


군에 입대했던 동생은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놓고 돌아선 채 영원한 군인으로 남았다. 네 살 터울이었던 나는, 동생이 떠난 이후로 삶을 사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늘 생각했다. 스물다섯의 젊은 죽음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 피붙이의 일로 겪고 나서야 삶의 무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정말 열심히, 자전거의 페달을 끊임없이 밟으며 살았다. 때로 쉬고 싶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오늘은 어제 떠난 이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라는,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그 말을 생각했다.      


몇 해 전 부모님이 보름여를 두고 차례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아빠는 일생 군인으로 살았으므로, 부모님 역시 대전 국립현충원의 아들 곁에 영면했다. 나는 전보다 더 자주 대전 국립현충원에 가게 되었다. 갈 때마다 묘역은 자꾸 늘어있었고, 더 많아진 죽음을 봤다. 

동생이 떠난 이십여 년 전엔 ‘그러니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났을 땐 그때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흘렀으므로 어느덧 나는 ‘잘 나이 먹는 일’을 생각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인생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만큼이나 빨리 흘렀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유지하는 것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가끔 멈춰서서 저 멀리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성직자 묘역의 입구 기둥에 쓰여있던 라틴어를 다시 생각한다. 읽을 수 없던 언어는 뜻을 알고 나자 더는 그림이 아니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있는 나에게 찾아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하는 수 없이 그만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을 생각해본다. 죽고 사는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나,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나는 잘 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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