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Dec 13. 2022

붕어빵을 사러 가는 길

                         

붕어빵을 굽는 아저씨가 바로 코앞 상가 앞에 등장한 것은 지난 11월 중순쯤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오가는 길에 나를 붙잡았다. 홀린 듯 그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일주일이면 서너 번 붕어빵을 사 먹고 있다.


붕어빵을 사 먹으려면 현금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현금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시대이니 붕어빵 아저씨는 계좌번호를 걸어놓고 장사를 하시긴 한다. 하지만 나는 매번 집에 굴러다니던 동전을 들고 나선다. 겨울이 되면, 역시 붕세권에 산다는 것은 나름 흐뭇한 일이다.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건널목을 건너려고 서 있을 때였다. 벌써 붕어빵의 고소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그때 문득, 커다란 호두 모양의 저금통에 매일 동전을 채워 넣곤 하시던 아빠 생각이 났다. 


학창 시절에 방학이 되면, 등교하지 않고 늦잠을 자도 된다는 해방감 말고도 다른 즐거움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아빠로부터 받는 '방학 보너스'였다. 방학이 가까워져 오면 아빠의 호두 저금통에는 동전들이 가득 차올랐다. 

“너희들 방학 보너스 주시려고 아빠가 열심히 동전을 갖다 넣으신다.”

엄마의 말에 우리는 두둑한 방학 보너스를 기대하며, 이미 한 손으로는 들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져 버린 호두 저금통을 들어보곤 했다.     


“호두 갖고 와서 깨봐라”

아빠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 삼 형제는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호두 저금통 뚜껑을 열어 동전들을 털어냈다. 신이 나서 재잘대며 열 개씩 모아 동전 탑을 쌓았다. 이윽고 저금통에서 쏟아져나온 동전들이 테이블 위에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정렬을 마치고 나면 아빠는 공평하게 그것을 삼등분하셨다. 이렇게 해서 받은 방학 보너스는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들어가기도 했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쓰이기도 했다.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자 제일 먼저 방학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어졌다. 제법 많은 돈을 동생과 둘이 나누니 전보다 방학 보너스가 두둑해졌다. 그러나 뒤이어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게 되자 이제 그 호두 저금통은 동생의 독차지가 되어 버렸다. 방학이면 동생은, 부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쳐다보는 두 누나를 약 올리며 호두 깨기에 바빴고, 동전을 정리해주는 누나들에게는 제법 선심 쓰는 척 피자를 한판 사주었다.     


동생이 군대에 입대한 이후엔 그 호두 저금통은 동생의 '휴가 보너스'가 되었다. 딸들 밑으로 늦게 본 외아들이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날을 기다리며 아빠는,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늘 짤랑 소리를 내며 호두를 채우셨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훨씬 건강하고 씩씩해진 모습으로 동생이 휴가를 나오면 아빠는 호두를 가져오라 하셨고, 우르르 쏟아져나온 은빛 동전들은 테이블을 한가득 채우며 탑으로 쌓여갔다.

 '돈 세는 것 도와주었으니 수고비로 나 좀 떼주라'라는 누나들의 아양에 동생은 여전히 인심 팍팍 쓴다며 피자 한 판을 사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동생이 제대를 코앞에 두고 그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집으로는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멀고도 먼 길이었다. 호두 저금통은 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며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해져 있는 채였다. 

"이제 저 호두 저금통은 보람이 거다! 가져다가 깨봐라."

동생을 보내고 나서 스산한 친정에 세 살이었던 어린 딸을 데리고 자주 드나들었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호두 저금통은 이제 딸아이 차지가 되었다.


호두 저금통을 열자 은빛 동전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딸아이가 동전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을 막으며 테이블 위에 열 개씩 탑을 쌓았다. 동생이 호두 저금통을 독차지하게 되었을 때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만큼 신이 나서 돈을 세는 것을 얼마나 부러워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수북이 쏟아져 나온 그 은빛 동전들을 쌓으면서도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 가지랬다고 진짜 혼자 다 갖느냐며 단돈 만 원이라도 나눠달라 동생에게 떼를 쓰던 시절이 그리웠다. 누나들을 놀리던 동생의 익살맞은 표정도 생생했다.     


“손녀 주신다고 할아버지가 열심히 넣으신다.”

돈이 뭔지도 잘 모를 그 어린 시절 이후, 늘 호두 저금통은 이제 딸의 '방학 보너스'가 되었다. 손녀의 방학이 가까워져 오면 엄마는 예전 우리 삼형제에게 하듯 같은 말을 했다. 딸은 방학마다 할아버지의 보너스를 받고 좋아했고, 그때마다 나는 동생을 떠올렸다. 부모님 역시 그러셨을 것이다.


딸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열심히 저금통을 채워 자식들 용돈을 주시던 아빠. 아웅다웅하며 동전 세는 걸 뿌듯하게 보시던 아빠. 이제 손녀까지 제 몫을 하는 사회인이 되어 더는 호두 저금통을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제 거꾸로 호두 저금통의 몇십 배는 받으셔도 되는데, 아빠는 안 계신다. 

딸은 할아버지의 호두 저금통을 소중히 제 방에 갖다 두었다. 지금도 가끔 딸아이 방에서 물끄러미 아빠의 호두 저금통을 바라본다.     


주머니 속의 동전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건널목의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고 천천히 길을 건넜다. 가까워지는 붕어빵 냄새. 동전을 내밀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붕어빵 네 개를 받아들었다. 들고 있는 봉투에 담긴 붕어 네 마리를 물끄러미 봤다. 이 겨울, 이렇게나 따뜻한 붕어빵을 아빠와 함께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