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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02. 2022

옷 정리를 할 때

                                           

어느새 여름이 떠난 자리에 가을이 앉았다. 머리 위에서 불타는 듯하던 태양은 어느새 슬금슬금 짧아지고, 식어가는 계절이다. 청소며 정리에 게으른 사람이지만 이렇게 날씨가 바뀌는 즈음이라면 옷 정리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 된다.      


나는 패션 감각이 있어 옷을 멋지게 잘 입는 사람도 아니고, 멋진 옷을 멋지게 소화해낼 몸매가 좋은 사람도 아니다. 사회생활을 오래 했으나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은 아니어서 늘 청바지와 티셔츠면 편했다. 옷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 그리 철마다 꺼내고 정리할 옷이 많을까 싶지만, 신기한 일은 새로운 계절이 올 때마다 꺼내고 버릴 옷들은 계속 나왔다.

어떤 옷은 해가 바뀔 때마다 걱정하는 그대로 ‘작아져서’, 그러니까 내가 더 살이 쪄서 입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옷은 분명 작년엔 괜찮았는데 올해 다시 보니 어딘가 모르게 후줄근해 있어서 꺼내놓기도 했다. 물론 작년에도 좋아했던 옷을 올해 또 입게 되었으니 반갑구나 싶은 순간도 있다.      


날씨가 야금야금 추워질 때마다 긴 소매 옷을 하나둘씩 꺼내어 입었다. 옷장 속엔 입지 않는 여름옷과 하나둘 꺼낸 긴 옷들이 섞인 채 걸려있다. 이제 입지 않는 여름옷은 모두 꺼내어 옷장 깊숙이 넣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여름옷을 정리해 넣는 건 봄가을의 옷을 정리할 때와 또 다른 마음이다. 봄에 넣어둔 옷은, 가을이면 다시 꺼내 입게 된다. 그런데 여름의 옷은 이제 넣어두면 내년 여름이 되어야 꺼낼 것이다.

      

‘내년 여름에 이 옷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옷장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대략 두 가지 이유다. 내년 여름에도 건강한 나로 이 여름옷을 다시 꺼내며 지금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는, 살짝 뭉클하고 비장한 마음이 하나이다. 그리고 옷이란 것은 대부분 작아져서 못 입는 경우가 태반인 나의 넉넉한 몸매를 생각하며 살짝 한숨이 나는 마음이 나머지 또 하나이다.     

친구는 외출할 때 옷을 갖춰 입고 거울을 볼 때면 '이렇게 나갔다가 혹여 내가 어디선가 사고로 죽게 된다면 이 옷을 입고 죽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아이, 무섭게스리….”

다들 이렇게 농담처럼 주고받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늘 준비할 수는 없는 영역 밖의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중에서 장담할 일이란 것은 사실 얼마 없다. 그러니 장담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것이다. 

내년 여름에 이 옷장 앞에서 여름옷을 꺼내는 나를 상상한다. 지난여름을 보내며 잠깐 가졌던 비장한 마음을 떠올리며, 다시 여름옷을 옷장에서 꺼낼 수 있게 되었으니 충분히 감사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 10월도 끝자락이다. 어느 계절이나 시작은 천천히 오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성큼 내 앞에 와있곤 한다. 특히 추위에 약한 나에게 겨울은 그 차가운 공기의 강렬함 때문인지 유독 쿵쿵, 몇 번의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다가오는 기분이다. 

내 인생의 옷장을 연다. 또 한 계절을 맞으며 지난 계절의 옷을 넣는다. 내년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지금 넣은 옷을 꺼내어 입을 날을 생각한다. 옷은 있되 내가 없을 수도 있고, 나는 있는데 옷이 작아져서 더는 입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 어떤 경우든 옷장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내가 있으니 나의 옷장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옷장 속 철 지난 옷들은 단정히 개켜서 정리해두고, 이 계절의 옷은 묵은 먼지를 털어 걸어놓기로 한다. 

내년 여름의 일은, 내년 여름을 맞이할 때 생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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