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Jan 03. 2023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무루

              

처음에 이 책을 잡았을 땐, 제목만 보고 아마도 할머니가 쓰신 글이려니 했다. 이전에 읽었던 몇 편의 책은 정말 ‘할머니’들이 쓴 책이었는데 따뜻하고, 위트 넘치는 매력적인 할머니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책을 몇 장 넘기며 읽다 보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할머니가 쓴 책은 아니었지만, 저자는 그림책의 리뷰를 에세이와 절묘하게 연결시켜 책 한 권을 만들어냈다. 정말 할머니가 쓴 글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위트 넘치는 것으로는 못지않았다.     


<나로 살아야 하는 일이 기쁨이 아닐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지금도 씨는 종종 뭉크는 개로 태어나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기왕이면 소설가가 좋겠다경험을 쫓아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니까김영하 작가는 여행이 망해도 글을 쓰면 되고주문한 음식이 맛이 없어도 글을 쓰면 되는 것이 소설가라고 했다실패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글감도 많아지니 제니와 뭉크의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이 아닌가.

모험은 내가 아닌 방식으로 나를 살아보는 일이다그림책 속의 많은 모험담들이 그런 마음으로 쓰였을 것이다한 소설가의 강연록 첫 문장을 보면 소설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두번째 삶입니다.  

이야기속에서 우리는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다혹은 누군가를 한번 더 살아보게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짓는 일에 대해서.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을 용기를 가졌느냐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나로 살아야 하는 일이 기쁨이 아닌 순간에도 글을 쓸 생각은 하는 것을 보면, 어쨌거나 쓰는 일 언저리에서 살고 있는 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을 때마다 나는 한 번 더 새로워진다. 아직 자신 없지만 언젠가는, 누군가를 한 번 더 살아보게 하고 싶다는 꿈을 가져보기도 한다.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나는 짧은 이 문장이 참 좋았다. 사는 일은 결국 나이를 먹는 일이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늘 나이를 먹고 있다. 그런데도 나이가 드는 일은 마치 늙어가는 일과 동의어로 쓰이는 일이 많다. 물론 나도 젊어서는 그랬다. 나이 든 날이 올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이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안이 오고, 앉았다 일어설 때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이제야 예전 부모님을 이해하겠고, 이제야 나이 든 어르신의 심정도 짐작하겠다. 그분들도 그랬겠구나, 한다. 물론 그 연배까지 살아낸 것은 아니니 모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사는 일은 끝내 이해받지 못하는 앞선 걸음을 걷는 일일지도.     

경험이라는 것이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참 와닿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계가 넓어지고 달라진다는 말에 묘하게 용기가 생겼다. 나이를 먹었다고 더 많은 것을 저절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전보다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이 경험해보려고도 한다. 나의 세계가 그렇게 넓어지고 시시각각 새로운 모양과 크기를 갖는 것은 멋진 일이다. 특히 나이 들어서는 자칫하면 고인 물처럼 변하지 않는 일상을 살게 된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것,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에 게으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엄마는 말끝에 종종 “사람은 다 자기 나이만큼이야.”라는 말씀하셨었다. 맏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며,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은 그만큼의 먹은 밥그릇 수를 무시 못 한다는 이야기이셨다. 물론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살아보니 참 많은 경우에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이야기 역시 그렇지 않을까. 읽은 모든 이야기가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는 것은 자기 시야에서 보이는 만큼이고, 내 처한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니 참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하나의 이야기가 저자 말대로 얼마나 많은 수의 이야기로 다가갈 것인가. 좋은 이야기일수록 그렇다는 말은, 곧 좋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일 테다.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애쓰는 것보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잘 어울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는 아닐까.     

예순이나 일흔쯤 되었을 때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유연한 몸을 가지고 (요가를 해야 한다더 부지런히 집안을 돌보고 (소를 이틀 이상은 미루지 말아야 한다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채소그러니까 토마토나 가지오이와 당근 따위를 직접 키워 먹고 (마당이 필요하다) 집 안팎의 아름다운 존재들을 돌보고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나면 돌아와 짤막한 글을 한 편씩 쓰고 (꾸준히 써야 한다.꾸준히 지금보다 많은 질문과 답을 알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글을 더 많이 읽고그러나 겸손하고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고더 많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모르는 건 미루지 말고 부지런히 배우고그래서 내 삶에 속한 이들이 함께 나눌 작은 기쁨이 많기를 (가까운 이들에게 인색하게 굴지 말고 잘하자바란다그러니 나에게 노년이란 상실의 의미이기보다 완성의 의미다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그래서 마침내 내 삶이 한줄의  아름다운 유언이고 유산이 되기를 바란다. >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가 어떻게 나이들고 싶은지에 관한 글이었다. 무척 공감이 간다. 나이가 드는 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드는 일은 축복이다. 살아있는 것들만이 나이를 먹는다. 그러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잘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즉 잘 늙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고, 주변을 깔끔히 하며, 자연을 가까이 두는 삶. 그리고 꾸준히 쓰고 읽는 삶. 그런 노년이 되어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일. 나 역시도 꿈꾸는 일이다. 다른 이에게 유산으로 남길 위대한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 될 자신은 없으나, 적어도 ‘좋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으로는 살고 싶다. 

먼 훗날은 오늘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오늘’부터 살아내 보기로 맘먹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척-레이철 호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