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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an 31. 2023

라면을 끓이며 - 김훈

                                  

글쓰기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그 비슷한 몇 가지 말 중 어느 강의에서, 누가 강의하든 나오는 소리는 ‘장황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결하고 짧게 쓸 것’이다. 나 역시도 수강생들에게 너무 길게 주절주절 쓰지 않도록 지적해주곤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글을 쓸 때도 지나치게 긴 문장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다. 소리 내 읽을 때 내 호흡이 달리지는 않는지 점검하기도 한다.     


무조건 짧은 문장이 다 좋은 건 아니다. 길고 유려한 문장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다들 짧게 쓰라고 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자칫 쓸데없이 나열하는 문장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간결하고 임팩트있는 표현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 짧게 쓴 문장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언부언 말이 길어지면,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은 마음은 글에서도 별다르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단문으로 써보세요.”라고 할 때 늘 인용하는 작가는 대부분 김훈이다. ‘칼의 노래’로 대표되는 김훈 작가의 글을 그 단문의 예시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예시로 들지 않더라도 책을 좀 읽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단문이라면 김훈 작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나도 깔끔하면서 강렬한 그의 단문을 좋아한다. 이렇게 짧은 표현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싶은 문장들을 만날 때면 역시….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훈 작가의 소설과 산문 여러 작품을 읽었다. 나는 사실 그의 작품 중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 단편소설 중 ‘화장’은 꽤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어떤 작가든 그렇겠지만 사람들의 취향은 호불호가 명확하다. 나 역시도 어떤 글은 퍽 좋았고, 또 어떤 작품에선 내심 실망스럽기도 했었다. 모호하게 언저리를 맴도는 특유의 표현들이 반복되어 식상하다고 느껴지는 지점도 있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데도 표현의 방식이 비슷했으므로 그러했다.

따지고 보면 김훈 작가의 글은 단문 말고도 꽤 긴 문장들이 많다. 심지어 그 긴 문장들은 아주 여러 번 끊어 읽어야 문맥이 이해될 정도로 난해하기도 했다. 단문이 워낙 그 인상이 강렬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문장도 그의 글에선 참 많이 보였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늙어서 울지 않는다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이상은 울지 않는 세월에도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긴 문장을 읽으며 표현이 모호하고, 난해하다고 느꼈는데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작가의 특유한 문체인 것 같다. 사람들마다 다른 말투가 있듯이 작가마다 고유한 글투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작품마다 매번 다른 새로움을 내뿜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읽는 이에게 익숙한 그만의 고유한 존재감이 가득한 문체를 대하는 기쁨 또한 그에 못지않을 듯하다. ‘그래서 식상하군.’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래서 좋은 거야’라고 말하는 독자가 왜 없겠는가. 


산문을 읽어가다 보니 군데군데 긴 문장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칼처럼 싹둑 썰어낸 듯 깔끔하고 단정한 표현의 단문이 함께 있다. 그의 단문은 간결하고 명확해서 객관식 문제 같지만 읽다 보면 마치 주관식 문제 같은 기분이 든다. 한마디 말이 열 마디를 이야기한다. 그런 글들을 모두 읽고 맨 끝 작가의 말을 읽을 때였다.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나는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첫머리 또는 끝부분에 ‘서문’, 또는 ‘작가의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서문이나 작가의 말을 그다지 유심히 보지 않았다. 목차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서문이라고 하면 장 그르니에의 작품에 붙인 알베르 카뮈의 서문이 정말 유명하다. 그런 것을 보면 서문이나 작가의 말도 그 책의 일부이니 본문만큼 같은 에너지로 써야 하고, 또 읽어야 할 것이지만 종종 대충 넘겨보게 된다.


이 책의 맨 뒤 ‘작가의 말’을 읽다 보니 작가의 마음을 잠깐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제 젊지 않은 작가는, 일생 써온 글들을 되돌려 생각하는 나이인 것이다.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는다는 말.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다는 말. 이제 사물과 직접 마주 대하려 한다는 말이 오래오래 남았다.

내가 그간 뿌려놓은 말과 늘어놓은 글들 역시 그렇다. 나를 떠난 그들을 주워 담을 수도, 불러 모을 수도 없겠으니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으니’ 한탄한 작가의 말이 더 공감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무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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