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차가 이렇게 곰탱이같이 생겼냐?”
새로 차를 뽑았다고 엄마에게 보여주러 갔던 날이었다. 마당으로 내려와 차를 처음 본 엄마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덕에 내 차의 이름은 ‘곰탱이’가 되었다.
곰탱이는 2009년식 소형 CUV이다. CUV란 SUV 와 세단의 중간쯤인 자동차 형태라고 한다. 차는 굴러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차량의 분류가 중요할 것은 없다. 하지만 CUV 자동차가 아니라 ‘내 친구 곰탱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뭇 다른 마음이 된다.
물론 이 ‘다른 마음’이라는 것이 자동차에 관한 지식이나 관리요령을 익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다른 마음이란, 늘 곰탱이에게 말을 건네고, 은근슬쩍 궁둥이를 한 번씩 두드려주기도 하며, 그가 쇳덩이로 이루어진 물성의 존재가 아니라 나와 교감하는 진짜 친구라 여기는 것이다.
처음 곰탱이를 만났을 즈음엔 낚시에 한참 미쳐있었고, 낚시가 아니더라도 모든 스트레스는 돌아다니는 것으로 풀던 시기였기에 우리는 정말 열심히 전국을 다녔다. 곰탱이는 나를 따라 아랫녘 제주도부터 민통선 너머 통일전망대까지 들어갔었다. 길이랄 것도 변변히 없는 임도를 따라 산도 몇 개씩 넘어봤고, 고속도로에 나서면 가끔은 시속 180킬로까지 밟으며 심장 쫄깃한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 운전하는 내내 나의 기쁨과 슬픔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이쯤 되면 역시 곰탱이는 나와 많은 비밀을 공유한 입 무거운 친구이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운명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난주 낚시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강원도 양양이라면 사람들은 하조대 바닷가를 생각하지만, 그 건너편 안쪽에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깊고 긴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곰탱이와 나는 그곳을 오래 다녔다. 2009년 가을, 곰탱이를 만나기 이전부터 나는 그 법수치계곡을 다녔는데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흐르며 그 깊은 계곡에도 펜션들이 많이 들어섰다.
“아휴, 올 때마다 펜션이 늘어난다, 그렇지?”
나는 곰탱이와 쉼 없이 주절주절 떠든다. 날이 갈수록 곰탱이와 더 많은 말들을 한다. 운전하다가 슬쩍 계기판을 봤다. 22만 킬로를 넘긴 지도 한참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곰탱이와 함께 달릴 수 있을까.
차를 그만 바꿔야 하지 하는 맘과 아직 멀쩡히 잘 달리는데 무슨…. 이런 맘이 공존한다. 어차피 대부분 차는 출고 대기기간이 퍽 길다. 다들 당장 나오는 것 아니니 예약부터 해놓으라고 했다. 예약을 걸었고, 내 차례가 왔지만 이미 두 번이나 미루고 있다. 다음번 다시 차례가 온다면 그때는 차를 바꾸게 될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물건을 곁에 오래 두고 쓰면 단순히 물건이 아닌 어떤 특별한 관계가 되는 기분이다. 하물며 나와 목숨공동체이기도 한 자동차라면 더욱 그렇다.
“잔고장도 없이 기름만 넣어주면 잘 달리는데, 내친김에 2자 여섯 개 찍어볼까 봐. 222,222킬로 달리고 인증샷 찍어야지.”
20만을 넘겼을 때 식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떤 물건이든 자주 새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차를 10만 킬로 넘게 탔다고 해도 오래 탔다는 소리를 하는데, 20만 킬로라고 하면 다들 놀랐다. 사실 나 역시도 이렇게 오래 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언덕길에서 힘이 좀 달리고, 에어컨 찬바람이 해마다 약해지긴 해도 여전히 씩씩한 곰탱이가 기특하기만 하다.
법수치계곡에서 돌아오는 길은 꽤 막혔다. 평일이었지만 공사 구간이 많았고, 금요일 오후는 하행선뿐 아니라 상행선도 정체 구간이 많았다. 게다가 하남 부근을 지나며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지선을 잘못 타는 바람에 다소 먼 길로 돌아와야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려고 하던 순간,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계기판에 선명한 붉은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222,222!
세상에! 해냈구나, 나의 곰탱이!
차 키를 꽂아놓은 채 한참을 앉아서 그 붉은 숫자를 바라봤다. 우리가 함께해온 많은 시간, 함께 갔던 참 많은 곳, 우리 사이에 쌓인 그 많은 서사.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 역시 그렇다. 그러니 우리가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그 날이 언젠가 오겠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동행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말이야 곰탱! 아무리 그래도 333,333은 좀 힘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