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집으로 초대를 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그녀는 출퇴근에 바쁘고 짬이 없을 텐데도 함께 저녁을 먹자고 우리 모녀를 부른 것이다. 딸의 친구를 중학생 시절부터 오래 보았는데, 막상 그 친구의 엄마인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모녀 여행을 가는 공항에서 처음 보았다. 어색하면서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나이를 물으며 친해졌다. 첫 만남이 여행이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했다는 딸들과 달리 그녀와 나는 여행 내내 같은 방을 쓰며 새벽까지 수다를 떨며 즐거워해서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국경이 봉쇄되는 팬데믹의 시작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리며 내년에 또 모녀 여행을 가자는 우리들의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로나19에 막혀 허공에 흩어졌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두 가족은 국내 여행을 다니고, 동네에서 종종 만나 밥을 먹고 많이 웃고 나서 헤어지곤 했다.
출퇴근하는 그녀와 시간을 맞추기 어려우니 간혹 현관 앞에 무언가를 놓고 온 적은 있지만, 집에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다. 그녀의 집에 가는 일은 은근히 기대되는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집의 고양이 ‘열흘’이 때문이었다.
딸의 친구와 그녀에게 열흘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딸의 친구가 얻어온 흰 고양이를 보고는 “열흘 안에 도로 갖다줘라” 했다던 그녀의 남편 덕에 그 고양이 이름은 열흘이가 되었다고 했다. 열흘 안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던 남편은 이제 열흘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열흘이가 가족들에게 어떤 사랑을 받고 사는지 알기에 궁금했고, 태어나서 한 번도 고양이를 가까이서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기에 기대됐다.
어려서부터 우리 가족은 늘 강아지와 함께 살아왔다. 강아지가 집에 없던 시절은 거의 없었다. 그처럼 강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했는데, 고양이는 달랐다. 나는 그들의 유리알같이 묘한 눈, 실밥이 뜯길 듯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스펀지처럼 무게감 없이 걸을 때 위로 쑤욱 올라와 구부러지는 그 등이 무섭고도 두려웠다. 게다가 고양이에 관한 많은 괴담이라니. 도무지 고양이는 친해지기 힘든 동물이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섰을 때,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강아지들이라면 벨 소리가 날 때부터 짖거나 낯선 이의 방문에 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집에 들어서서 인사를 나누고 한동안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양이는 그 집에 있지도 않은 듯 기척이 없었다. 물론 집안을 한 번만 스윽 둘러보면 그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는 있다. 집안에 캣타워, 고양이 침대, 식기 등 열흘이 살림이 한가득이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있어요.”
딸의 친구를 따라 살그머니 방에 들어섰을 때, 고고한 흰털을 하고 다소 야릇한 자세로 몸을 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몰티즈 루비보다도 큰 덩치의 흰 고양이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지 않아요”라고 딸의 친구가 말했지만, 무서운 마음은 영 가시지 않아 조심조심 고양이에게 손가락을 대어보고, 살짝 용기가 생긴 후엔 쓰다듬고 만져봤다. 뭔가 개와는 다른 슬라임 같은 느낌의 몸이랄까. 고양이는 몸도 느낌도 신기한 동물이다. 맘 같아선 강아지에게 하듯 품에 꼬옥 안고 쓰담쓰담하고 팔다리도 조물락조물락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인형 발처럼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바늘같이 뾰족한 발톱이 나올 것만 같았고, 강아지들보다 훨씬 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하악질을 할 것만 같았다. 안으면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진다는 고양이의 몸을 품에 넣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 무서워….”
딸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한다. 하지만 이미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니 개와 고양이가 잘 지낼지 자신도 없거니와 더 큰 문제는 털이라는 걸 실감했다. 온 집안에 휜 고양이 털이 날아다녀서 코도 간질, 팔다리도 간질간질했다. 대체 그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하지만 우리도 개와 함께 사니 모르는 것일 뿐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개를 예민하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털 안 빠지는 몰티즈예요…. 하지만 개라고 크게 다를 것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감수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개나 고양이도 그렇다. 털이 빠지지만, 냄새가 나지만 그래도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감수하고, 그 뒤처리를 하면서 함께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가 무섭지만, 다음엔 혹시 모르겠다. 몇 번 더 열흘이를 만나게 된다면 한 번쯤은 안아보는 것에 성공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