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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01. 2023

안아보고 싶지만

                                   

지인이 집으로 초대를 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그녀는 출퇴근에 바쁘고 짬이 없을 텐데도 함께 저녁을 먹자고 우리 모녀를 부른 것이다. 딸의 친구를 중학생 시절부터 오래 보았는데, 막상 그 친구의 엄마인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모녀 여행을 가는 공항에서 처음 보았다. 어색하면서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나이를 물으며 친해졌다. 첫 만남이 여행이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했다는 딸들과 달리 그녀와 나는 여행 내내 같은 방을 쓰며 새벽까지 수다를 떨며 즐거워해서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국경이 봉쇄되는 팬데믹의 시작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리며 내년에 또 모녀 여행을 가자는 우리들의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로나19에 막혀 허공에 흩어졌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두 가족은 국내 여행을 다니고, 동네에서 종종 만나 밥을 먹고 많이 웃고 나서 헤어지곤 했다.    

 

출퇴근하는 그녀와 시간을 맞추기 어려우니 간혹 현관 앞에 무언가를 놓고 온 적은 있지만, 집에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다. 그녀의 집에 가는 일은 은근히 기대되는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집의 고양이 ‘열흘’이 때문이었다.

딸의 친구와 그녀에게 열흘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딸의 친구가 얻어온 흰 고양이를 보고는 “열흘 안에 도로 갖다줘라” 했다던 그녀의 남편 덕에 그 고양이 이름은 열흘이가 되었다고 했다. 열흘 안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던 남편은 이제 열흘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열흘이가 가족들에게 어떤 사랑을 받고 사는지 알기에 궁금했고, 태어나서 한 번도 고양이를 가까이서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기에 기대됐다. 

    

어려서부터 우리 가족은 늘 강아지와 함께 살아왔다. 강아지가 집에 없던 시절은 거의 없었다. 그처럼 강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했는데, 고양이는 달랐다. 나는 그들의 유리알같이 묘한 눈, 실밥이 뜯길 듯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스펀지처럼 무게감 없이 걸을 때 위로 쑤욱 올라와 구부러지는 그 등이 무섭고도 두려웠다. 게다가 고양이에 관한 많은 괴담이라니. 도무지 고양이는 친해지기 힘든 동물이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섰을 때,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강아지들이라면 벨 소리가 날 때부터 짖거나 낯선 이의 방문에 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집에 들어서서 인사를 나누고 한동안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양이는 그 집에 있지도 않은 듯 기척이 없었다. 물론 집안을 한 번만 스윽 둘러보면 그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는 있다. 집안에 캣타워, 고양이 침대, 식기 등 열흘이 살림이 한가득이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있어요.”

딸의 친구를 따라 살그머니 방에 들어섰을 때, 고고한 흰털을 하고 다소 야릇한 자세로 몸을 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몰티즈 루비보다도 큰 덩치의 흰 고양이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지 않아요”라고 딸의 친구가 말했지만, 무서운 마음은 영 가시지 않아 조심조심 고양이에게 손가락을 대어보고, 살짝 용기가 생긴 후엔 쓰다듬고 만져봤다. 뭔가 개와는 다른 슬라임 같은 느낌의 몸이랄까. 고양이는 몸도 느낌도 신기한 동물이다. 맘 같아선 강아지에게 하듯 품에 꼬옥 안고 쓰담쓰담하고 팔다리도 조물락조물락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인형 발처럼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바늘같이 뾰족한 발톱이 나올 것만 같았고, 강아지들보다 훨씬 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하악질을 할 것만 같았다. 안으면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진다는 고양이의 몸을 품에 넣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 무서워….”     


딸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한다. 하지만 이미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니 개와 고양이가 잘 지낼지 자신도 없거니와 더 큰 문제는 털이라는 걸 실감했다. 온 집안에 휜 고양이 털이 날아다녀서 코도 간질, 팔다리도 간질간질했다. 대체 그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하지만 우리도 개와 함께 사니 모르는 것일 뿐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개를 예민하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털 안 빠지는 몰티즈예요…. 하지만 개라고 크게 다를 것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감수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개나 고양이도 그렇다. 털이 빠지지만, 냄새가 나지만 그래도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감수하고, 그 뒤처리를 하면서 함께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가 무섭지만, 다음엔 혹시 모르겠다. 몇 번 더 열흘이를 만나게 된다면 한 번쯤은 안아보는 것에 성공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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