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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29. 2023

상반기 결산

                                    

6월의 마지막 날. 달력을 뜯는 날. 올 한해의 반이 지났고, 올 한해의 반이 남아있다. 

돌아보면 올해 상반기는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막상 이런저런 일들이 닥쳤을 땐 당장 눈앞에 날아온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는 데 급급해서 주변을 돌아보거나 다른 그 어떤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엄청난 일이 있었구나, 싶은 것이다.     


1월엔 가족 모두 일본 도쿄로 향했다. 팬데믹이 막 시작되던 해의 1월에 우리 가족이 몇 달 전부터 계획해서 떠났던 곳은 런던이었는데 그 이후 가족 모두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런던을 갈 때만 해도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코로나가 그렇게 전 세계적인 감염병이 될 줄 몰랐다. 다녀오고 나니 우한 폐렴은 코로나19로 이름을 바꿔 달았고, 전 세계를 휩쓸며 듣도 보도 못한 몇 년을 보내야만 했다. 종종 그간 우리가 다녔던 여행을 추억했다. 그런 시기를 보내고 몇 년 만에 떠난 가족 여행지가 올해 초의 도쿄였다.

여러 해 전에도 딸과 함께 왔던 적이 있다. 딸은 그때 우리 부부를 따라다녔지만, 이제 몇 년 사이 우리가 딸을 따라다니고 있어서 웃음이 났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카페, 굿즈샵들을 따라다녔다. 우리 부부는 일본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널려있는 ‘가챠’기계를 눈여겨본 일도 없었건만, 딸 덕분에 그 가챠뽑기 하는 것을 처음 봤다. 역시 나이에 따라 다른 모습의 여행이었다.     


즐거웠고, 알찼던 여행이었지만 여태 한 번도 걸린 적 없는 코로나에 걸렸다. 목이 좀 쉰 것 외에 별다른 증상이 없어 혹시나 했는데 진단키트에 빨간 두줄이 떴을 때는 당황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본의 그 작고 작은 호텔 방에서 셋이 함께 먹고, 자고, 씻었는데 끝내 나만 두줄이었다는 것이다. 걱정했는데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거의 한 줄로 돌아왔는데 그만큼 코로나의 기세가 약해져서일까,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생각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여행 중의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몇십 년간 연락이 끊긴 삼촌의 부고를 들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친가 외가의 모든 어르신도 마찬가지로 떠나셨다. 단 한 분 삼촌은 소식이 끊긴 지 삼십 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불쑥 낯선 도시의 주민센터 담당자가 이국에 있는 내게 전화 와선 삼촌의 부고를 전해주었다. 여행하고 있는 나와 쓸쓸하게 혼자 떠난 사람의 소식과 허무하고도 무거운 인생의 일을 생각했다.     


귀국 후 이런저런 행정절차와 함께 삼촌의 상속 포기 절차를 밟는 데에도 여러 달이 걸렸다. 사촌 동생들과 나의 형제, 그리고 조카들 모두 여덟 명의 서류를 모아야 했다. 두 명은 국적이 달랐고, 한 명은 해외 거주 중인 경우여서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삼촌이 나의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막상 돌아가신 삼촌의 서류를 떼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삼촌은 부모도 형제도 배우자도 자식도 없었으므로 조카들이 1순위 상속인이 되었기에 상속 포기신청을 하는 것인데, 주민센터에선 상속 1순위가 아니라 서류를 떼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상속 1순위가 아니면 왜 상속 포기신청을 할 것이며, 상속 포기신청을 하려면 이 서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담당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순위 상속자들의 사망이 서류로 확인되는데도 같은 소리였다. 

결국 구청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구청 공무원이 모든 선순위 상속대상자들의 사망을 모두 확인하고 나서 서류를 떼주었다. 구청에선 오래 걸려도 해줄 수 있던 일을 왜 주민센터에선 끝내 안된다고 했을까. 안되는 것은 누구나, 어디서든 안되어야 정상이고 되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누구나, 어디서든 가능해야 옳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조항이란 생각을 했다.     


상속 포기신청이 얼추 마무리 될 때쯤엔 멀쩡히 걷다가 자빠져서 무릎 골절 수술을 받았다. 3월 3일이었다. 응급실에 갔고, 금 간 무릎뼈를 나사와 와이어로 고정하는 수술을 했으며, 며칠 입원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절뚝거리며 온 봄을 보내고도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와이어와 나사 빼는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남아있다.     


이런 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생의 이런 굴곡진 일들이 몰려오던 해가 왜 없었겠는가. 대부분 어렵게 넘었던 IMF의 파도를 우리 가족도 애쓰며 넘었고, 동생이 사고로 떠난 봄을 겪었으며, 부모님이 이십여 일을 사이로 영영 떠난 곳으로 돌아간 오월도 겪었다. 난데없이 담석증으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병원에서 쓸개를 떼고 집으로 돌아온 가을도 있었다.

그러니 이런 해는 없었다고 자신할 일은 못 된다. 살면서 아프고, 힘든 일이 없는 꽃길만 펼쳐졌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할 때마다 어이가 없어 나는 그냥 웃었다. 해가 바뀌고 석 달 동안 우르르 한 번에 몰려온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랬다.     


3월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목발과 보호대를 차례차례 벗었다. 다리를 절뚝절뚝하면서도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다리의 수술 흉터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애써 걷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다친 것인지, 장애인인지, 아니면 뇌졸중 같은 병의 후유증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걸었다. 

힘들게 걸어 다닌 그 시간은 내게 장애인이나 교통약자들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신호가 바뀌기 전 건널목을 건너기 힘들었고, 당황스러운 순간에 누군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무심하게 지나쳐갔지만, 간혹 작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제는 지나간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코로나는 타이레놀을 두 번 먹고 감기보다 가볍게 지나갔으며, 상속 포기 절차는 오래 걸렸지만, 어찌어찌 완결되었다. 무릎은 여전히 뛸 수 없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버겁지만 이제 장거리 운전을 하고, 하루에 만 보를 돌아다니는 날도 있을 만큼 회복했다. 와이어를 빼는 재수술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나아지는 수술이고, 그 정도의 수술인 것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교훈은 얻었다.      


“운이 계속 안 좋아.”라고 했을 때 딸이 해준 말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넘어진 순간까지만 운이 나빴던 것이고, 그 이후로는 오히려 좋은 운이라고. 생각해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주말이었는데 당직도 아닌 무릎 전문의가 있었으니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웃을 일인지 모르겠지만 입원실은 나름 스카이라운지 뷰를 자랑하는 9층 창가여서 입구 쪽 환자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몇 달간 애를 먹이고 보정명령까지 나왔던 상속 포기 절차는 심판문을 받은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다친 다리는 뛰거나 계단을 다닐 것이 아니라면 얼추 멀쩡하게 걷는 듯 보인다. 흉터는 길게 남았지만, 우리나라의 여름은 사계절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집 앞 텃밭이 당첨되는 바람에 얼결에 텃밭 농부로 살며 텃밭일지를 책으로 낼 준비도 하고 있다. 매년 한 권의 에세이집을 내겠다는 나의 계획대로라면 아마도 내년에 나올 책은 바로 ‘나의 텃밭일지’가 될 공산이 크다.     


이처럼 비극과 희극은 한 끗 차이다. 닥치면 비극, 지나가면 희극인 것 아닐까.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상반기 봄의 일들이 지나고 생각하니 삶의 교훈이고, 나를 되돌아볼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상반기를 마무리한다. 나머지 올해의 하반기 역시 긍정적으로, 씩씩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맘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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