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히라에 내렸을 때 하늘은 흐렸고, 간간이 굵은 빗방울이 털어대듯 흩뿌렸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비였다. 고토히라를 가기로 했을 때 꼭 보고 싶었던 것은 기도발 좋다는 고토히라궁이 아니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극장인 곤피라 가부키 소극장과 거대한 석등 모양의 등대였다.
물론 가파른 수백 개 계단을 올라 꼭 고토히라궁을 마주해보고 싶었다 할지라도, 지난 3월 골절 수술까지 한 나의 다리로는 불가능했을 것을 안다. 나의 다리로 뛰지는 못해도 평지는 그럭저럭 걷는다. 하지만 아직 계단을 평소처럼 한발씩 오르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니 애초에 고토히라궁을 꼭 오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신이 다행스러웠지만 아쉽지 않을 리가 없다.
살다 보면 그렇다. 내게 불가능의 영역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 왜 없겠는가. 그때의 포기하기 힘든 마음과 포기해야만 하는 마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한다. 때로 그 거리는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때로는 아득히 멀어 그림 속 풍경 같기도 하다.
고토히라궁을 오르는 계단 입구에서 사람들은 모두 씩씩하게 올라갔다.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 흩뿌렸으므로 미리부터 우비를 입은 사람도 있고, 긴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은 이도 있었다. 입구 가게에선 아예 지팡이를 100엔에 빌려주기도 했다.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가 뒤섞여 계단 길을 채웠다.
그 계단 입구에서 몇 걸음만 오르면 왼쪽으로 길이 갈라졌다. 공중화장실 방향인데, 그곳을 지나치면 거짓말처럼 인적이 뚝 끊기고, 고요로 가라앉았다. 바로 곤피라 가부키 극장으로 오르는 길이다. 계단 대신 경사가 제법 있는 비탈길이며, 커다란 안내판도 있다.
오르막길에 들어섰을 때 날씨마저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스콜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듯 후드득 굵게 떨어지던 비는 언제 일이냐는 듯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졌던 빗방울들의 흔적은 사라지고, 갑자기 무더워진 날씨엔 그늘 바람마저도 시원하지 않았다.
우산을 다시 펴서 양산 삼아 머리를 가린 채 가파른 오르막을 천천히 올라 언덕위의 곤피라 가부키극장을 만났다. 입장료 500엔을 내고 들어서니 관리인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그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일어는 할 줄 아는지 물으시곤 실내화를 내어주시며 휘장을 내린 극장 입구에 우리를 세웠다. 그리곤 마치 연극배우처럼 극적인 몸짓으로 한 번에 휘장을 휙 걷어 화려한 내부를 보여주었다.
그가 짜잔! 하는 듯 휘장을 걷어주어 한눈에 드러난 가부키 극장의 내부는 짐작보다도 더 화려해서 내 얼굴에도 그 감탄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의 주름진 얼굴에 드러나는 자부심 같은 것을 잠깐 봤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래 무언가를 지켜온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고, 여전히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아주 잠시 그런 것이 어렸던 그의 얼굴은 곧 성실한 안내자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일어를 할 줄 아는 남편에겐 일어로 설명을, 내가 일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을 알고는 일본어 억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설픈 영어단어를 섞어가며 설명해줬다.
500엔의 입장료를 내고 볼 가치가 있을까 싶은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고토히라궁을 오르는 계단이 워낙 유명한 곳이니, 고토히라에 왔어도 곤피라 가부키 극장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1830년대에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소극장이라는 설명답게 바닥에선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기둥이며 무대에선 세월이 그대로 묻어났다. 하지만 그저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여전히 가부키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답게 세월의 흔적은 느껴지지만, 쇠락의 냄새는 나지 않는 곳이었다. 비록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끝없이 다듬으며,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곳이어서일까. 오래된 곤피라 가부키 극장은 당당했다. 나 역시 그처럼 나이 들었으면 했다. 나이가 들며 당연히 늙겠지만, 쇠락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극장 안에는 우리 부부와 한 명의 서양인이 관람객의 전부였다. 공연을 준비할 때 쓰는 무대 뒤의 방들, 연주가 이루어지는 무대 지하의 공간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위층에도, 지하에도 내려가 보라는 그에게 다리의 수술 흉터를 보여주며 난감한 얼굴을 하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극장에서 나오려는데 그가 말했다. 예전에는 일본이 더 잘산다고 생각했으나 요사이는 한국이 너무나도 발전해서 이제 소득수준이 더 놓은 것 같다고.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대접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서울에 두 번 가본 적이 있다는 그에게 지금의 서울을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고토히라의 곤피라 가부키 극장에서 나와 간 곳은 ‘다카토우로高灯篭’라고 하는 27m 높이의 석등이다. 1865년에 완공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석등으로 아래는 석재인데 윗부분은 나무 건축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양이었다. 늦은 밤, 석등에 불을 켜두면 그 불빛이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오가는 배들에 닿아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바다의 신인 곤피라가 모셔진 고토히라의 불빛을 바라보며 깜깜한 바다를 항해했을 선원들에게 이 석등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고 싶었던 그 등대는 역시 한산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높은 석등 앞에서 한동안 선 채로 올려다봤다. 이곳의 불빛이 멀리 바다에서도 보였다는 그 밤의 풍경을 상상했다. 누구는 가슴에 등대를 품고 산다. 또 다른 누구는 그 등대 불빛을 보고 어딘가로 나아간다. 어느 쪽이 나은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등대 불빛은 오래, 그리고 멀리까지 이어졌으면 했다.
잠시 후 비가 다시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며 석등에 동그란 빗방울 얼룩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우산을 꺼내어 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