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29
“너는 입맛이라는게 아예 없는 거지?”
식구들이 우리 강아지 루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녀석의 식성은 대단해서 거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육류, 야채, 곡류 할것없이 입에 넣고보는 스타일이며 심지어 녹즙, 홍삼즙도 한 숟가락 주어보면 낼름 먹어치우고 더달라고 매달려 사람을 놀래키는 녀석이다. 음식에 까다롭고 잘 먹지 않을 때 ‘입맛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루비의 먹성이 이쯤되다보니 ‘입맛’따위는 없이 그저 무엇이든 입에 넣고 먹어치운다며 이런 농담으로 놀리곤 한다.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들은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애완견 전용사료가 드물던 때였고, 지금처럼 개가 사람대접을 받으며 온갖 전용 간식을 먹는 때도 아니었다. 개들은 잔반을 먹었고, 사람이 먹던 간식이 남으면 던져주곤 했었다.
결혼해서 요크셔테리어를 한 마리 데려다가 열아홉살까지 함께 했었다. 아람이라는 이름의 그 녀석은 깍쟁이 공주님이었다. 아람이의 시절엔 나 어린 시절과 달리 개 사료가 보편화되었고, 간식도 많아졌지만 지금처럼 수제간식이 흔하진 않았다.
아람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호불호가 분명한 녀석이었다. 배는 먹지만 사과는 먹지 않았고, 말린 바나나는 먹었지만 생바나나는 먹지 않았다. 개에게 주면 안된다는 포도를 너무 좋아해서 한 개를 주면 껍질만 뱉어내고 야무지게 알맹이만 뽑아 먹었다. 뿐만 아니라 익힌 채소가 아니면 생채소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개들은 원래 생채소를 안먹는 줄 알았을 정도이다.
우리집 루비는 모든 음식을 다 가리지않고 좋아하고 잘 먹었는데 특히 채소를 썰기위해 도마를 꺼내면 득달같이 달려왔다. 오이, 당근 모두 좋아할뿐 아니라 특히 아삭이고추를 너무 잘 먹었다. 뱉어내겠지하고 고추하나를 던져주었는데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물고가서 야무지게 다 뜯어먹었다. 마치 갈비 뜯듯이 한쪽 발로 고추 끝을 누르고 반대편 끝에서부터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맛있게도 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가끔씩 아삭이 고추를 주곤 했다.
텃밭에 가지, 깻잎, 상추를 심으며 아삭이고추 모종도 함께 심었다.
“이건 우리 루비 줘야지.”
호미로 아삭이 고추 모종을 꼭꼭 누르며 따라나온 루비에게 말했다. 알아듣는지 마는지 꼬리를 흔들어대는 루비와 그 이후에게 가끔 함께 텃밭에 나와 물을 주었다. 비료도 거의 주지 않고, 물만 먹이다시피했는데도 아삭이고추는 여러개 열렸다. 한뼘보다도 길게 자란 아삭이고추가 신기해 몇 개 따다가 루비에게 주었다. 어찌나 신이 나서 아삭이고추를 뜯어먹는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들 웃었다. 말티즈종인 루비의 입주변은 흰털이 푸르게 물이 들었다.
“고추밭가서 서리해먹은 꼴인데...”
식구들은 모두 루비를 보고 웃었다.
한낮에는 볕이 너무 뜨거워서 요즘은 텃밭에 물주러 저녁 해질 무렵에 나선다. 여섯시가 넘어 해가 조금씩 드러누워가는 즈음에 루비에게 하네스를 채워 둘이 텃밭을 향해 걷는다. 루비는 궁둥이를 귀엽게 실룩대며 텃밭으로 가서는 내가 물조루에 맑고 차가운 물을 채워 텃밭에 뿌리는 것을 보며 기다린다. 처음에 작은 모종들로 가득한 텃밭에 데려왔을때엔 내밭 네밭 구분없이 마구 밟고 다니려고 해서 한동안은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이제 텃밭은 온갖 작물로 정글이 되어있으니 저도 그 속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않았다.
텃밭에 물을 주고나서 루비와 함께 동네를 한바퀴걷는다. 해는 서서히 내려앉고, 뜨겁게 달궈졌던 한낮의 공기는 조금씩 식어가는 저녁. 평화롭고 느긋한 한때가 그렇게 지나간다. 나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루비와 이렇게 동네를 걷고 싶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