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28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오늘은 텃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비가 길어지면 또 걱정이 된다. 늘 무엇이든 그 ‘적정선’이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자연현상이든 마음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새로 모종을 몇 개 심은 직후였다. 대파, 서리태, 비트를 심어놨는데 특히 대파가 걱정이었다. 모종 상태부터 풀인지 뭔지 싶을 정도로 가냘픈 것이 크게 자란 대파를 상상하기 힘들고 제대로 뿌리나 내릴까 싶은 것이다. 게다가 너무 더운 날이어서 제대로 흙을 꼭꼭 눌러주지 않고 대충 심은후 에어컨을 찾아 도망치듯 텃밭을 떠났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얼굴에서 땀이 뚝뚝 흐를 정도의 더운 날이어서 꾀가 났었으니 말이다.
이틀 동안 내린 비가 그치고 텃밭에 나갔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지만, 비가 그치고 공기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섞인 적당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텃밭의 채소들은 다행히 잘 자라고 있었다.
비가 충분히 왔으므로 물을 줄 필요는 없어 작물들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한숨이 났다. 뒤쪽으로 심은 가지 고추 깻잎은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콩나물시루 같고, 앞줄의 옥수수 열무 서리태 비트 구간은 상대적으로 널널해서 잡초가 우세 종으로 보이는 총체적 난국의 텃밭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얼치기 텃밭 농부는 가지를 먹어만 봤지 가지 열매가 열린 것을 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렇게 크게 자라는지 알 수 없었다. 아삭이 고추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가지, 고추, 깻잎은 무성해져서 자기들끼리 잎이 뒤엉키기도 했고, 열매가 있는지 보려면 뒤적뒤적 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식물은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비 그친 후에 맘먹고 뒤적뒤적했더니 신기하게도 가지 여러 개가 달려있어 그중 세 개나 딸 수 있었다. 열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아삭이 고추도 한 뼘 넘게 길게 자라있는 것들이 여러 개라 한 줌도 넘게 수확했다. 깻잎은 여전히 잘 자라고 있는데, 나는 깻잎이 그렇게 벌레가 좋아하는 작물인 줄 몰랐다. 가지잎은 벌레 먹은 것이 거의 없는데 깻잎은 그와 대비될 정도로 벌레 먹은 잎이 많았다. 농약 없이 작물을 재배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로구나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가지와 아삭이 고추, 그리고 깻잎을 여러 장 따고 나서 앞쪽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뒤쪽과 달리 앞은 휑하다. 물론 상추를 다 뽑아내고 새로 모종을 심은 탓이지만, 처음부터 오와 열을 맞춰 심지 않은 터라 상추를 뽑아낸 자리에 순차적으로 심은 모종들 역시 제멋대로의 대열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잡초가 얼마나 많은지 잡초들은 열무 옆에서 작물인 듯 자라고 있는 형국이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새로 나오고, 쑥쑥 컸다. 역시 잡초다.
손바닥만 한 텃밭 하나를 가꾸면서도 식물의 간격을 생각해서 파종하고 모종을 심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심기전부터 자란 후의 덩치와 키, 그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에 따라 적당한 간격을 주고, 앞이나 뒤에 배치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던 가지 모종이 내 허리만큼 자라난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작물을 심는 일이든 사람의 일이든 늘 지금의 모습만 보고, 지금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다가올 날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일은 오늘에 있다. 내일이 올지 말지도 모르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할 수도 있지만, 내일 무성하게 자랄 가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늘 가지에 물을 왜 주겠는가.
오늘의 수확물을 챙겨서 해가 나오기 시작하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강아지 루비 군이 좋아라하는 아삭이 고추, 가족들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가지. 그리고 따는 족족 절임 간장에 넘치게 담기고 있는 깻잎들.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이틀이나 비가 왔으니 이삼일은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