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히라를 떠나는 날. 료칸의 조식은 지난 저녁의 식사보다 간소하지만, 역시 눈을 사로잡는 예쁜 차림이다. 평소 집에선 아침을 늦게 먹거나 건너뛰는 일이 많다. 게다가 여행중의 조식이라면 대부분 빵과 계란 정도였는데 이렇게 보기에도 예쁜 한끼를 먹다니 제법 호사스런 아침식사였다.
고토덴을 타기위해 천천히 걸었다. 동네는 고요하고 한적하다.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지는데, 골목엔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아파트 문화가 아니어서인지 시원하게 통창을 가진 구조도 아니고, 그나마 밖으로 향하는 창의 커튼을 내리고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뜻 보이는 실내는 어두컴컴해보이지만, 그 안의 분위기는 또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네 한옥도 안과 밖의 느낌이 사뭇 다른 것처럼.
지난 저녁엔 다섯시쯤을 넘기니 문을 닫은 상점이 대부분이었다. 고토덴을 타러 거리를 걷던 시간은 오전 아홉시쯤이었는데, 여전히 대부분의 상점은 닫혀있었다. 늦게 열고 일찍 닫는 것일까. 아니면 평일과 주말, 여름과 겨울에 따라 다른 온천마을의 풍경인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당당한 분위기를 내뿜는 곤피라 가부키극장과 석등 다카토우로를 뒤로 하고 고토하라를 떠나는 고토덴을 탔다. 한눈에 봐도 아주 오래되었구나 싶은 열차는 덜컹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앳되보이는 기관사는 혼자 운전하면서도 출발시마다 매번 정면을 향해 수신호를 했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 기차는 서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오래된 것이 전해주는 느낌은 편안함, 익숙함, 혹은 아련함 같은 것. 그러니까 추억이다. 덜컹거리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고토덴안에서 우리의 1호선 국철을 생각했다. 최신식의 발전된 기술은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 하지만 오래된 것들이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꺼내보이는 추억의 순간들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내가 스무살 무렵 타고다니던 1호선 국철은 지금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지하철의 모습이 아니었다. 에어컨대신 선풍기가 돌고, 소음도 크고, 승차감도 좋지 않았다. 한시간 가까이 고토덴을 타고 가는 내내 오래전 그와 비슷한 우리의 국철을 타고 다니던 젊던 나와, 함께 웃던 친구들과, 그렇게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고토덴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리쓰린 공원이었다. 리쓰린 공원은 일본에서 가장 큰 공원이라고 하는데 누가 보아도 일본스러운 느낌의 조경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분재를 연상시키는 소나무들. 자갈에 빗살무늬로 정리해놓은 가레산스이식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와센이라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연못을 천천히 돌며 사공의 설명을 들었다. 사공은 16번까지의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풍경사진을 미리 나눠 주고, 그 번호앞에서 배를 잠시 멈춘채 설명을 해주었다.
한낮의 태양은 덥고도 더웠는데 그 햇살아래 푸르름이 어찌나 선명하던지. 여행을 떠나오기 직전 읽은 책에서 작가가 여름을 ‘선명한 계절’이라고 표현한 구절을 내내 생각했다. 막상 읽을때는 한번에 와닿지 않던 표현이었는데, 막상 리쓰린 공원의 그 태양아래서 와센을 타면서 계속 생각났다.
배에서 내려 연못 주변을 걸었다. 같은 곳이지만 배를 타고 뭍을 보는 것과 걸어다니며 물을 보는 것은 참 다르다. 내가 어디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같은 풍경도 이리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천천히 걷다가 연못가에 자리잡은 전통찻집에 들어갔다. 신을 벗고 다다미방에 앉아 일본전통정원의 모습과 푸른 연못과 건너편 언덕을 봤다. 그리고 말차를 마셨다. 망중한이라는건 이런 것 아닐까. 몇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모두 조용했고 찻집 밖의 풍경도 온통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하늘도, 바람도 모두 조용하던 순간. 여행에서 잠시 이런 순간을 만나는건 진정한 쉼표처럼 느껴져서 참 좋다.
시내로 들어와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로비직원에게 추천받은 인근의 먹자골목에 있는 이자카야에 갔다. 관광객은 없고 현지인들만 주로 드나드는 곳인듯 했다. 하이볼과 츄하이를 마셨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하이볼은 꽤 유행이다. 나 역시도 친구들과 모이면 술은 무조건 소주라고 하던 문화에 익숙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알콜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취하는 것도 피하게 되어서 그저 적당한 취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하이볼은 참 좋은 술이다.
음식은 깔끔하게 나왔다. 관광객 대상의 가게가 아니어서인지 영어메뉴는 아예 없어서 파파고 번역으로 어떤 재료의 음식인지 확인해서 주문했다.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런 것이 여행의 재미이기도 하다.
퇴근후 직장인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심야식당이 떠오르는 분위기였는데 보이는 것과 실제가 같을리는 없지만 여행이란 이런 것 아닐까. 내 자리를 잠시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니 여행에선 모든 것이 다 풍경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현실에서 한발 떠나 풍경을 보기위해 여행을 간다.
먹고나서 동네를 걸었다. 상점들은 이어졌고, 사람들도 끊임없이 오갔다. 다카마쓰가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편의점조차 거의 없던 어제의 고토하라에 비할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