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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Oct 13. 2023

손수건을 묶는 마음

                             

“가방에 이런 걸 장식하고 다니네?”

웃으며 배낭 손잡이에 묶어둔 손수건을 보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 손수건!”이라고 하자 친구는 “아….” 하며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엄마가 매일 들고 다니는 건 가벼워서 제일이라는 레스포삭의 크로스백이었는데, 그 안에는 지갑, 장바구니 같은 것들 사이에 손수건이 항상 있었다. 엄마는 늙으니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찔끔찔끔 난다며 손수건을 자주 꺼내 들었고, 여름이 되면 땀과 번진 화장을 닦았다. 나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늘 그 손수건을 여행 배낭에 묶고 다닌다.      

친구는 물끄러미 내 가방에 묶인 손수건을 봤다. 스무 살 무렵부터 엄마를 봤고, 계속 한동네에서 이웃으로도 살았던 친구다 보니 부모님이 떠나신 이후에도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떠난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떠날 사람들이 될 그 모든 우리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가 아닐까.   

  

내가 적당히 양보하고 맞춘 것처럼, 그 역시도 내게 그랬을 것이니 우리가 함께한 싱가포르 여행은 꽤 편안했다. 우리는 둘 다 쇼핑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인증샷을 남기는데 열성인 여행자도 아니었다. 여행지의 필수코스라고 말하는 곳을 가도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람들이어서 느긋했다. “우리 이 정도의 속도와 텐션이면, 싱가포르에 한 달 살기 하러 온 사람들 같지 않아?” 서로 말하며 웃었다.   

   

여행을 떠나면 최대한 여행자티를 내지 않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영어가 되지 않고, 한국에서도 편한 것이 최고라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남의 나라에 가서 여행자의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편한 여행자로 돌아다닌다. 

이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템은 크로스백 대신 메고 다니는 10리터짜리 작은 배낭이다. 작은 열쇠로 배낭의 지퍼를 채우고 목걸이 지갑 하나만 걸고 다니면 굉장히 편하다. 싱가포르에서도 역시 나의 그 작은 배낭에 엄마의 붉은 손수건을 묶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낯선 거리를 걸었고, 발걸음을 잡는 많은 곳을 함께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앉아 엄마의 손수건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읽을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곳을 여행하는 즐거움과 두려움을 함께 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며칠 후 밤의 창이공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는데, 이십 명쯤의 흑인 무리가 근처에 일렬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티셔츠를 모두 맞춰 입고, 어느 나라인지 모를 국기가 그려진 모자를 똑같이 쓰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손수건을 배낭에 묶고 있듯이 그들도 국기 문양이 그려진 손수건을 가방에 묶거나 목에 두르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친구와 나는 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 모자의 마크는 아마도 국기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리고 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아프리카 국기를 검색했다. 같은 국기를 찾지 못했다. 우리의 편견이었을까 싶어 결국 전 세계 국기를 검색한 끝에 드디어 알아냈다. 그들 모자의 국기는 ‘동티모르’의 것이었다.     


탑승을 준비하며 그들 사이에 우연히 서게 되었는데 한 명이 어눌한 억양의 한국말로 우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 사람…. 입니까?”

우리는 놀라고 반가워서, “맞아요, 맞아요!” 했다. 한 명이 말문을 열자 주변 일행들이 다들, 마치 자기들의 한국어를 시험해보고 싶었다는 듯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한국에 갑니다.”

“우리는 동티모르사람입니다.”

모자의 국기를 보고 우리가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하니 그들도 반가워했다. 왜 한국에 가느냐고 묻는 우리의 말에 그들 대답이 의외였다. “야구하러 갑니다.” 우리는 놀라서 “baseball?”하고 되물었는데, 그들 중 다른 일행 하나가 정정해줬다.

“야구, 아닙니다. 우리는 일하러 갑니다. 한국 가서 일 구해야 합니다.”

그 순간 잠시 멍했다. 뭐라 알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몰려왔다. 어디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원조를 받는 빈국이라고 알고 있는 그 동티모르의 국민이 우리나라에 일하러, 돈을 벌러 간다는 것이다. 그들 청춘의 몇 년을 낯선 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지금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 또래일 앞뒤의 발랄한 한국인 여행객 틈에 끼어 서 있는 그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자정이 훨씬 넘어 출발했으므로 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늘 그렇듯 다섯 시간을 채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깨어있었다. 뒤편에 앉아 잠들어 있을, 혹은 뒤척이고 있을 동티모르인들을 생각했다. 어느 외진 농촌이나,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혹은 크고 작은 건물이 지어지는 거친 현장에 저들은 서게 될 것이다. 더위에, 혹은 추위 속에서 몸을 쓰며 일하는 그들.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그들을 상상했다. 동시에 힘든 하루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겨운 한국인 동료를 만나는 그들. 정당한 돈을 받아 고국 동티모르의 사랑하는 가족에게 보내는 행복한 얼굴의 그들도 상상했다. 누구나의 인생처럼, 그들의 한국살이 역시 하나의 모습일 리는 없다.     


입국심사를 끝내고 캐리어를 기다렸다. 수화물 벨트 위를 도는 캐리어들은 눈에 띄는 족족 주인을 찾아갔다. 다들 여행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홀가분한 얼굴로 자기 캐리어를 집어 들고 총총히 공항을 나서는데 눈에 익숙해져 버린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동티모르 국기가 인쇄된 스카프를 묶어둔 여러 개의 캐리어가 계속 벨트 위를 돌고 있었다. 관광이 아닌 취업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니 입국심사가 그리 간단하고 쉽게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항리무진을 타고, 엄마의 손수건이 묶인 작은 배낭을 무릎 위에 놓았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엄마의 손수건을 묶어 다니는 내 마음과 국기가 그려진 스카프를 캐리어에 묶어두는 그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조국 동티모르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들을 생각했다. 그 손수건으로 그들이 이 땅에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흘리는 땀은 닦을지언정 억울한 눈물을 닦을 일은 없었으면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버스 안에서 엄마의 손수건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렸다. 여행은 짧았는데, 나는 어쩐지 이 여행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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