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 속에 들어있는 것은 푸른 부추 한 다발이었다. 봉지에 든 부추는 대충 손으로 잡아봐도 두툼했다. 부추 봉지 아래 얌전히 놓인 일기장을 폈다. 여전히 삐뚤빼뚤한 글씨로 펼쳐진 그녀의 일상을 읽었다.
스무 살이 되었으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간단한 대화조차 되지 않는 중증 장애인 아이를 돌보는 그녀의 애틋한 맘을 봤다. 휠체어가 아니면 바깥바람 쐬는 일은 불가능하고, 온종일 핸드폰 만화만 들여다보는 아이를 하루에 잠깐이라도 세상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게 해주고 싶어 했다. 아무리 정신연령이 아기나 마찬가지여도 몸은 청년이므로 칠십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쉬울 리가 없지만, 아이가 좋아하면, 나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다.
“잠깐 나가다오니 너무 좋아해서 나도 그만 기분이 조왔다.”
장애인 모자 둘만 사는 집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는 매일 간다. 스무 살 아들도, 그 엄마도 운신이 쉽지 않은 장애인이니 그 집에서 순옥님은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바쁠 것이 분명하다. 일기 속 하루는 아침이면 출근해 저녁을 먹이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두 장애인의 배설을 치우고, 씻기고, 닦이는 일의 연속이다. 아들은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가 아니니 생떼를 쓰고, 아이의 엄마는 오랜 병고로 몸과 맘이 예민하고 날이 서 있다. 그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일상을 읽으며 때로 한숨이 났다.
“대채 왜 이러는걸가요?”
힘들게만 하는 모자의 이야기 끝에 순옥님은 나에게 묻듯 이렇게 썼다. 나는 빨간펜으로 틀린 글씨를 고치며 첨삭했다. 대체, 걸까요. 그리고는 잠깐 망설이다 옆에 한 문장을 보탰다. s님, 힘내세요!
그녀와 계절이 세 번 바뀔 동안 한글 공부를 했다. 딸이 운영하는 수학학원의 빈 강의실을 이용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이었다. 그러다 딸이 학원을 정리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된 바람에 한글 수업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수업 시간, 그녀는 떡볶이를 사 들고 와서 수줍게 내밀었다.
“미안해요. 맛있는 걸 사줘야 하는데 이런 거밖에 없어서….”
나는 저녁을 막 먹고 온 참이어서 속으로 당황했고, 게다가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떡볶이를 먹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내 반가운 얼굴을 했다.
“저녁 안 먹어서 마침 배고팠어요. 그리고 저 떡볶이 엄청 좋아해요.”
그날 저녁 그녀와 둘이 그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다. 이제 한글을 조금 알것같고, 텔레비전 자막이 보이고, 가게 간판 읽는 재미가 붙었다는 그녀는 아쉽고 쓸쓸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너무 맘에 걸려 나는 그만 덜컥 새로운 제안을 하고 말았다.
“일기를 써보세요! 매일 일기를 써서 화요일과 금요일에 출근하시면서 우편함에 넣어두고 가시면 제가 운동 삼아 동네 산책하다가 들러서 볼게요. 틀린 것은 교정해서 다시 넣어 드리고요.”
일기를 써본 적 없다는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뭐 드셨어요?”
“고사리나물 무쳐서 먹었지요.”
“그 고사리 어디서 사 오셨어요?”
“요양보호하고 오는 길에 지에스에서 어제 저녁에 사 왔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s님! 그걸 쓰세요. 그게 바로 일기에요. 어제저녁 요양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지에스에 들렀다. 고사리나물을 사 왔다. 아침에 무쳐서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쓰시면 그게 일기에요. 굶는 날은 없으시죠? 그러니까 편하게 해 드신 것 쓰세요. 혹시라도 속이 안 좋아 굶으셨거든 그 이야기를 쓰시면 되는 거예요. ”
그녀의 눈이 빛났다. “정말 그렇게 써도 되는 거예요? 매일 쓰면 진짜로 틀린 것들을 봐줄 수 있어요?”라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렇게 해서 봄에 시작된 우리의 우편함 수업은 여름을 지나고, 이제 가을로 들어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그녀는 매번 미안해했다. 지난 3월의 골절 수술 뒤끝이니 운동 삼아 동네 산책을 해야 한다고, 내가 필요해 걷는 김에 우편함을 열어보는 것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고 해도 같은 얼굴이었다. 어느 날엔 건빵 몇 봉지가, 또 어느 날엔 호박이며 상추 봉지가 들어있었다. 채소들을 넣고 출근하는 길엔 “우편함에 호박 넣어뒀어요, 가져가요.”라는 다정한 카톡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삼일 치의 일기를 검사하고, 틀린 부분은 빨간펜으로 교정해나가다가 노트의 삐뚤빼뚤한 글씨들 맨 아래에 적힌 문장 하나에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샘, 너무 고마습니다. 그동안 정드러서 보고 시퍼요.”
s님의 하루하루가 모인 일기들이 노트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그 귀퉁이에서 발견한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저도요! 더위 조금 가시고 나면 우리 함께 맛있는 것 먹어요.”
빨간펜으로 답신을 적고, 웃는 스마일 이모티콘 하나도 그려 넣고는 노트와 빨간펜을 다시 405호 우편함 속에 넣고 돌아섰다. 1층 출입문이 열리고 현관 출구를 걸어 나오다가 우편함을 돌아봤다. 우편함 속에 얌전히 들어있을 그녀의 일기장. s님의 글자들이 모인 그녀의 하루, 이틀, 일주일. 그렇게 쌓여가는 그녀의 인생과 그 인생을 잠시 마주 대하는 내 인생의 몇 분을 생각했다.
아파트를 나서는 저녁 바람이 한결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녀와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한 계절은 아무래도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