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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11. 2023

옥수수의 마음

텃밭일지 36 


드디어 옥수수를 수확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초보 텃밭 농부에게 농사랍시고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낯설고 어려운 일 천지이지만, 그중에서도 수확의 시기를 가늠하는 일은 난제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옥수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다른 작물과 달리 옥수수는 껍질로 덮여있으니 안의 열매가 영글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까볼 필요도 없어. 수염이 갈색으로 시들면 그때 따면 돼.”

시골이 고향인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는 매일 텃밭에 나가 옥수수에 물을 주며 수염을 들여다봤다. 연한 빛에서 점점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초보 농부에게 그 ‘시들면’이라는 정도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대체 어느 만큼 시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옥수수수염은 갈색으로 시들었고, 마치 행운목의 이파리처럼 축축 늘어진 옥수수 잎끝 역시 조금씩 시들어가는 것만 같아 이제 더는 기다리지 말고 옥수수를 따야겠다고 비장한 마음을 먹고 텃밭에 나갔다. 막상 텃밭에 도착해서야 뭔가 ‘연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가지는 줄기에 잔가시 같은 것이 있어 매번 장갑을 끼고 가위로 잘라서 수확했다. 상추나 깻잎, 그리고 고추는 손끝에 힘을 주어 톡톡 끊어내면 되었다. 열무도 대부분 쑥쑥 뽑아내는 것이 수확의 형태였다. 그런데 옥수수라면…? 일단 옥수수는 그들과 크기부터 다르지 않은가. 아무래도 가위나 칼을 가지고 나왔어야 하나 싶었다.     

옥수수를 수확하는 걸 실제로 본 일은 없다. 그저 짐작으로 장갑을 끼고 힘을 주어 아래로 꺾으며 옥수수 열매를 땄다. 굵은 줄기에서 옥수수 열매가 뿌직, 소리를 내며 꺾어져 나오는 느낌은 작은 텃밭 채소를 수확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우습긴 하지만, 난데없이 진짜 농부가 된 기분이랄까. 

여섯 그루의 옥수수에서 거둔 것은 아홉 개의 옥수수였다. 이미 열매가 열릴 때부터 가지대 하나에 한 개씩밖에 열리지 않는다는걸 알았다. 아는 언니는 옹골차게 열매를 키워내는 작물이라 하였지만, 어째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성비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작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옥수수 아홉 개를 따고 나서 낑낑대며 빈 옥수숫대를 뽑아냈다. 한여름의 태풍과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은 옥수숫대를 힘주어 뽑아내자 잔뿌리에 흙이 덩어리로 딸려 나왔다. 옥수수는 온 힘을 다해 뿌리를 사방으로 뻗고, 사력을 다해 그 힘으로 버티고 한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옥수수 아홉 개를 따고 뿌듯한 마음보다, 흙덩이가 잔뜩 딸려 나온 뽑힌 옥수숫대를 보는 짠한 마음이 더 컸다. 

“애썼다.”

어쩐지 옥수수에게 이 말 한마디를 해주고 싶었다.      


집에 가지고 온 옥수수는 생각보다 튼실하게 알이 차 있었다. 비료도 거의 주지 않고, 그저 물로만 키운 셈인데 이렇게 알이 영글고, 빛깔이 고운 옥수수라니. 옥수수를 삶아서 한입 먹어보고는 더욱 놀랐다. 마치 설탕을 넣고 삶은 옥수수처럼 달았다. 껍질도 얇아 식감 역시 좋아 뿌듯한 마음으로 옥수수 하나를 먹었다.

내가 여름내 물을 주어 키운 옥수수. 내가 키운 옥수수의 맛. 그 옥수수를 먹다 말고 물끄러미 창밖을 봤다. 창밖은 아직 여름이다. 하지만 그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의 공기가 말해준다. 서서히, 조금씩 무언가에 다가가거나 혹은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늘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오고, 또 간다. 

알 수 없는 어느 날엔 갑자기 뽑혀 나갈지라도, 사력을 다해 발밑의 흙 사이로 뿌리를 뻗는 마음을 생각했다. 남은 옥수수를 먹으며 어쩐지 여름의 끝맛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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