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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10. 2023

그녀처럼

                              

W님은 내게 짧은 글쓰기를 배운다. 좀 더 정확히는, 사용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카톡에 문장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일흔 초반의 그녀는 다른 직업을 가져본 일은 없으나 일생 주민센터와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감투를 쓰고 일을 했다. 이를테면 부녀회장, 주민자치위원, 지역 발전협의회 같은 것들이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그녀의 카톡 친구 수는 나보다도 훨씬 더 많고, 단톡방 역시 달랑 몇 개가 고작인 나와 달리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려야 할 정도로 다양하고 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다.     

 

그렇게나 많은 인맥과 여러 모임이며 단체의 리더를 하는 그녀는 요즘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워했다. 전화가 제일 편한데, 전화로도 다 잘 모였는데 이제는 문자도 아니고 카톡을 해야 모임도 할 수 있는 시대라고 씁쓸해했다. 예전과 지금의 맞춤법이 다르니 행여나 예전 맞춤법을 그대로 썼다가 노인이라 한글도 제대로 못쓴다는 핀잔을 들을까 봐 문장 하나 쓰는데도 노심초사했다. 좀 더 멋지고, 그럴듯한 표현으로 깔끔한 문장을 만들어 공지 사항도 올리고 싶어 하지만 늘 자신이 없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의 나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 온갖 모임의 장이며 직책에 욕심을 내고 내려놓지 못하는 그녀를 노욕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아무리 일생 좋아서 해온 일이어도, 이렇게 배워가면서까지 그 감투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젊은 사람들이 은근히 ‘이제 나이 드신 분들은 그만 관두고 쉬셔야지’하는 말을 듣고 속상해하면서도, 그럴수록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고 이렇게 배우는 것이 맞는 건가 했다. 나 같으면 적당한 시기에 벌써 관두었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여러 달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나의 그런 생각은 바뀌었다.      


그녀는 늘 단톡방에 올라온 다른 이의 글에 적절하면서도 보기 좋은 답글을 궁리했다. 모임의 장으로 공지를 올릴 때는 전문적이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글로 보이기 위해 조사 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계절과 절기에 맞는 인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거나, 약간의 위트를 넣는 일도 종종 시도했다.

그녀의 문장은 거칠었고, 뜬금없을 때도 있었는데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문장을 고쳐갔다. 그 모임의 성격과 이슈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나 역시도 적절한 멘트로 교정해줄 수 있었기에 늘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제3의 멤버, 혹은 그림자 멤버가 된 것 같다고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조금씩 시적인 표현을 넣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를 과하지 않게 적당히 쓰며 글의 분위기를 살릴 줄도 알게 됐다. 

카톡에 쓰는 문장이라고 해봐야 고장 다섯 문장 이내의 짧은 글이다. 짧기에 쉬울 수도,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녀는 언제인가부터 그 다섯 문장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정리해내는 묘미를 느끼고 있는 듯도 보였다.      


그녀는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밖에서 활동하는 것에서 생의 활기를 찾는 사람이다.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지만, 악보를 잘 볼 줄 모르고, 찬송가를 따라 부르기 힘들다고 성악학원에서 따로 개인지도를 받으며 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모임의 총무를 맡고 싶은데 모든 공지를 카톡으로 해야 한다면, 제대로 된 총무 일을 해보고 싶어 짧은 문장을 쓰는 글쓰기 수업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노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경로당이나 복지관에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무료 지하철을 타고 시간을 때우거나, 하릴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 세월을 보내는 것만도 아니다. 이제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배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가 멋지게 느껴진다. 나도 그런 사람으로 나이 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젊은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쌓여 노년을 맞는다. 노쇠해지지만, 그만큼의 경험이 쌓이는 것이니, 칠십 해를 넘게 살아온 사람의 경험을 우리가 쉬이 짐작하거나 우습게 여겨선 안 된다.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든 누구나 저절로 그런 대접을 당연히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 내게도 노년은 멀지 않다. 삶이 허락한다면 노인이 되는 일은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드는 일은 저절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다. 

조용하고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런데 그 ‘조용하고 품위 있게’라는 그것이 집안에서 조용히 정물화처럼 늙어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림이 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멋진 그림이 되지 않더라도, 어설프더라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W님처럼 세상이 바뀌면 내가 배워야지, 라는 마음을 갖는 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무엇도 저절로 주어지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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