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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22. 2023

아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오카리나 소리엔 바람이 담겼다. 맑고 청아하면서 가늘게 떨리는 소리는 마치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어느 물가에 비스듬히 앉아 건너편 산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고구마를 닮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악기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숨을 불어넣는다. 손가락으로 열거나 닫아서 그 숨소리를 조절한다. 내가 불어넣은 숨은 구멍을 막은 손가락에 부딪히고, 열린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다. 오카리나 밖으로 빠져나온 숨은 바람이 되어 허공에 흩어진다. 흩어지기 전, 잠시 머무는 그 찰나의 움직임이 소리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엄마는 다섯 살 무렵부터 억지로 나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음악에는 영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피아노뿐 아니라 대부분 악기에 관심이 없었다. 리코더도 제대로 불지 못했고, 하다못해 탬버린이나 캐스터네츠 박자도 매번 제대로 못 맞췄다. 그렇다고 해서 음치는 아니었고, 심지어 악보는 함께 레슨받는 친구들보다도 더 빨리 외울 수 있었지만, 음악성 없는 박치였음이 분명하다. 결국 억지로 체르니 40번까지만 겨우 끝내고 그저 악보나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았다.     


이런 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근처 문화센터의 오카리나 강의를 등록했던 건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고구마같이 생긴 이 오카리나가 뭐 별거겠어, 리코더나 매한가지겠지. 가벼운 맘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웠고 피아노와 달리 손가락이 헷갈려서 음계를 연주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결국 도부터 솔까지 익힌 것이 나의 한계였다. 라가 시작되자 더는 악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손가락을 어쩌지 못하고 오카리나와 함께 한 짧은 음악 인생을 접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우연히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시작했다는 오카리나 이야기를 듣고, 오래전 내가 ‘라’에 막혀 때려치운 일이 생각났다. 문득 그때의 오카리나 소리가 떠올라, 지인을 따라 덩달아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솔’까지 뿐이며, 그나마 오카리나를 잡는 자세부터 가물거렸다. 다른 수강생들의 반짝이는 도자기 오카리나가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십몇 년 전 경험으로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으니 그냥 싼 보급형 악기로 다시 시작했다.     


같은 것도 언제,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 참 다르다. 오카리나 수업엔 이미 여러 해 오카리나를 연주해 공연팀에 합류한 지인도 있으며, 나처럼 초초초보 수준이어서 의지가 되는 지인도 있다. 이렇게 함께 하는 덕에, ‘라’의 벽에 막혀 때려치웠던 과거와 달리 한 옥타브를 넘는 음계도 익혔다. 이제 반음 연주에 들어서며 새롭게 당황스러운 나날이 펼쳐지고 있지만, 예전과는 달리 재미있게 하고 있으니, 좀 더 오래 오카리나를 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수업에 나오는 이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다.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한참 위의 연배이신 분들도 있다. 나는 수업 시간 중에 중종 그들을 둘러본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뽐내는 이도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연주하고 사라지는 이들도 있다. 제법 연세가 있어 보이는 분들이 진지하게 악보를 응시하며 오카리나를 부는 모습을 가끔 곁눈으로 본다. 그들을 보며 나의 십 년 후, 이십 년 후를 상상하기도 한다.     

 

좀 더 오래 하겠구나 싶어 바꾼 나의 악기를 만지작거려본다. 검은색 도자기로 빚어진 반짝반짝 아름다운 나의 오카리나. 하지만 오카리나와 오카리나 소리는 다른 것이다. 오카리나는 내가 숨을 불어넣지 않아도 오카리나로 존재하겠지만, 오카리나 소리라면 그렇지 않다. 

길잡이처럼 악보를 집중해서 들여다본다. 오카리나에 숨을 불어 넣는다. 악보에 맞춰 손가락으로 막거나 열어 가며 나아갈 길을 찾는다. 닫히거나 때로 열리는 구멍을 통해 나의 숨은 바람이 되어 소리로 만들어졌다가 이내 흩어진다. 그렇게 흩어져 사라지는 오카리나 소리. 

그 소리를 끊임없이 잇기 위해 오늘도 오카리나에 나의 숨을 계속 불어넣는다. 살아가는 일이란 어쩌면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일과도 닮아있다.      


내가 영원하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에게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사라질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오카리나 소리처럼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찰나를 지나 바람 속으로,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것이 결국 인생이라면 나는 잘 사라지고 싶다. 여전히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오늘도 오카리나를 불어본다. 내 숨을 불어넣은 오카리나 소리는 아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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