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39
하루가 다르게 배추도, 무도 자라난다. 동시에 매일매일 배춧잎의 구멍은 많아지고 커진다. 제일 겉의 잎들은 먼저 나와 먼저 컸다는 이유로 벌레들의 공격을 최전방에서 감내하는 중이다. 그 결과 배추의 겉잎은 이제 줄기만 남다시피 했고 그에 비해 안쪽의 잎들은 제법 깨끗한 편이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안쪽의 잎들도 벌레의 무자비한 공격에 구멍이 숭숭 뚫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약을 뿌리자니 영 찜찜하고, 두고 보자니 속이 터졌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비장한 각오로 나무젓가락을 챙겨 들었다. ‘벌레를 잡아야 한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 리가 없다.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자 싶은 마음에 인터넷에서 배추에 주로 서식한다는 배추벌레를 찾았다. 애벌레의 사진을 마치 흉악범 몽타주 보듯 매의 눈으로 쏘아봤다. 그리고 배추벌레와 함께 배추 농사를 망치는 주범으로 지목된 달팽이도 확인했다. 혼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요 녀석들! 이제 다 죽었어!”
몽타주를 확인하고 노트북의 화면을 닫으려는 때였다. 배추벌레, 배추벌레 흰나비...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비라고? 흰나비라니…?
그렇다. 아무리 문과생이지만 학창 시절 생물 시간에 뭘 배웠는지 나란 사람에게 배추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배추벌레가 커서 배추흰나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그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흰나비. 그것이 배추에 알을 낳고, 애벌레가 되며, 번데기 시절을 거쳐 나비로 날아오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알로 1주일, 유충으로 1개월, 번데기로 2주일의 시간을 지나 성충이 되며, 성충은 10일에서 20일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는 설명을 읽고 놀랐다. 성충이 되기 이전과 비교해 성충이 된 후의 삶이 너무 어이없을 만큼 짧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오래 견뎠는데 정작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이 열흘뿐이라니. 미워하고 죽여버릴 궁리만 했는데 잠깐 멈칫했다.
조금 복잡해진 마음으로 텃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제 어느 시간에 집 밖 거리로 나서도 더 이상 뜨겁지 않은 계절이다. 며칠 내린 비로 텃밭은 입구부터 촉촉했는데, 텃밭 작물들 사이사이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나비였다. 아마도 내가 인터넷에서 봤던 그 배추흰나비일 것이다. 얼추 봐도 열댓 마리쯤은 되어 보이는 나비무리가 텃밭 작물들 위로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나비들을 바라보다가 가져간 젓가락을 꺼내어 배춧잎을 뒤적뒤적했다. 배추겉잎은 그물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벌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달팽이들은 잎 뒤쪽에 한두 마리씩 자리 잡고 있어서 대략 스무 마리는 넘어 보이는 달팽이들을 젓가락으로 잡아냈다.
텃밭 작물 위로 나풀대는 나비들을 물끄러미 봤다. 알로, 애벌레로, 번데기로의 삶을 끝내고 성충이 된 녀석들일까. 나의 배추를 갉아 먹고 저리 성충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까. 성충의 삶은 수컷은 열흘, 암컷은 이십여 일이라고 한다. 저 나비들은 며칠밖엔 날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나의 배추가 더 이상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낳은 알이 다시 배춧잎 사이에 자리 잡고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성충이 될 날을 견디겠지,오래오래. 하늘을 날 수 있는 열흘의 삶을 살기 위해 웅크린 채 그 몇 배나 되는 세월을 보내겠지.
살충제를 뿌리지는 못하겠고, 젓가락으로라도 잡아내 볼까 나온 길이었는데 열흘의 삶을 사는 그들의 날갯짓을 보고 나니 어쩐지 더 복잡한 마음이 됐다. 그들에게는 열흘을 날더라도 날고 싶은 삶이 있는 건 아닐까. 설령 그들의 시간이 열흘뿐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해도 젖은 날개를 말리고 하늘로 날개를 펴고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을 꿈꿨던 건 아닐까. 그 자유를 꿈꾸며 나비로서의 생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웅크리고 보냈던 건 아닐까.
나는 텃밭의 정자에 앉아 이리저리로 날아다니는 그들을 좀 더 바라보다 돌아왔다. 배추벌레를 어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채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 맞는가. 그냥 놔두어야 하는가. 하지만 내 텃밭 작물도 소중하다. 그들도 살려야 한다. 아무래도 이것은 독하디독한 딜레마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