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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26. 2023

더불어 숲

                             

영흥 숲공원이 개장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한참 된 이야기다. 근처에 멋진 곳이 생겼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멀거나 가깝거나 상관없이 궁금한 곳이 있다면 무조건 가고 보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다. 하지만 그곳 영흥 숲공원은 마음과 달리 선뜻 가게 되지 않았다. 맘먹고 걷자면 걸을 수도 있을 만큼 멀지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유는 사실 멀리 있지 않다. 그곳을 오가는 길엔 부모님을 보낸 장례식장을 지나게 된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나에겐 여전히 두 분을 보내드린 그 앞을 지나는 일이 힘겹다. 물론 외곽으로 빙 돌아서 간다면 어찌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숲공원을 가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그곳에 가게 될 때가 오겠지. 억지로 다가가거나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때가.’  

   

내게 온 일들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왔다. 때로는 둥실 떠오를 것 같은 기분으로, 더러는 막막하거나 순식간에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순간으로 오기도 했다. 어떤 일은 왔다가 금세 사라지며, 또 어떤 일은 오래 남아 나를 힘들게도, 기쁘게도 한다.

일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오는 일도 그랬다. 누구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누구는 뾰족하게 마음을 찌르면서 왔다. 누구는 오래 나의 손을 잡고 있기도 하고, 또 누구는 매몰차게 뒷모습을 보이며 휙 돌아서기도 했다.     


친구를 넓게 사귀지 않는 사람에게 이웃을 사귀는 일이 쉬울 리는 없다. 게다가 대부분 집 밖에 있었으니 이웃과 안면을 틀 기회도 없어 이사 온 지 십 년이 다 되어오도록 아는 얼굴이 몇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동네에서 글쓰기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만난 E님과 함께 여러 달 글을 썼다. 얼결에 오래전 때려치웠던 오카리나도 같이 배울 용기가 났다. 그러다가 오카리나를 배우는 또 다른 이웃 S님을 알게 되어 이제 세 명의 이웃이 함께 모여 매주 글을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뒤늦게 민화 작가임을 알게 된 S님 덕분에 민화의 세계도 즐기는 중이다. 무려 세 가지나 되는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이웃이라니. 이쯤 되면 엄청난 인연이다.   

  

S님을 포함한 오카리나의 공연팀이 영흥 숲공원에서 열리는 공연에 참여한다고 했다. 이제 겨우 악보나 따라가는 수준인 나에게 그런 공연은 멀고도 먼 이야기다. 하지만 함께 배우는 이들의 공연이며,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이웃의 공연이라니 가보고 싶었다. E님과 함께 숲공원에서의 그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을 때, 마음속의 내가 말했다. 이제 그때가 왔구나. 

지금이 그때라는 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그 자리에 갈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숲공원에 오카리나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막힘없는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오카리나 소리는 실내에서 수업할 때와는 사뭇 다른 감동이었다. 짧은 공연이 끝난 후 동영상도 찍어드리고, 열심히 연습해서 공연팀에 합류하라는 덕담도 들었다. 즐거운 뒤풀이를 마치고 우리 셋은 S님의 남편이 운전하시는 차에 편하게 올라탔다. 

즐거운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중에 차는 부모님을 보낸 장례식장 앞을 지났다. 그곳을 생각할 때면 검은 운구차의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끄러미 내다보던, 이른 새벽의 거리 풍경이  먼저 떠오르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즐거웠고, 편안했다. 

S님의 남편은 인자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계셨고, 이웃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차창 밖엔 퇴근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차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저절로 온다. 놓고 떠난 이들을 오래 추억하던 자리에, 어느 오후의 한순간이 이렇게 평온한 풍경으로 덧칠되는 일도 그랬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산다. 만나는 많은 사람을 모두 알고 지내는 것은 아니며, 아는 사람이 모두 친구인 것도 아니다. 취미라는 것은 의무와 계산에서 비켜선 시간을 즐기는 일이다. 그러니 가까이에 그 인생의 여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건 더없는 행운이 맞다. 

우연히 마주한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서 이제는 저마다의 나무를 심고, 함께 가꾸고 있다.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숲 사이로 오솔길을 낸다. 오솔길을 따라 바람이, 햇살이, 사람이 오간다. 

이런 무게 없는 인생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우리 모임의 이름은 ‘더불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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