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내내 차 안 가득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날씨였다. 나를 감싸고 있는 따스하고 화사한 공기가 히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눈 부신 햇살은 대시보드에 얹힌 먼지 한 톨까지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아주 잠깐 봄을 느꼈다.
문막휴게소를 지나고, 중앙고속도로로 바꿔탔다. 표지판은 남원주, 제천이 앞에 있다고 알려줬다. 이 길은 익숙하다. 올해로 십팔 년 차에 들어서는 내 낚시 인생의 3분의 2쯤은 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만나는 제천 나들목으로 들어가 닿을 수 있는 정선에 있으니까.
그 정선의 후미진 곳에 개미들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속해있다. 그 개미들 마을 입구부터 동남천이 안쪽까지 길게 흐른다. 그 물길을 따라가면 동강에 닿는다.
동남천의 그 긴 계곡엔 무지개송어가 살고 있다. 강원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계곡은 꽁꽁 얼지만, 용천수인 그 동남천 계곡물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으니 낚시꾼들은 그 무지개송어를 낚으러 일 년 내내 개미들 마을을 찾았다.
하지만 막상 나는 한겨울에 낚시를 떠난 일은 없다.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낚시할 다른 때를 기다렸다. 그 기다린 다른 때에 딱히 조과가 더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낚시를 좋아하면서도 몸은 게을렀던 낚시꾼은 늘 핑계가 많았다.
그래도 오랜 낚시 인생에 강원도는 친근하다. 언젠가부터 강원도라면 거리에 대한 감각이 다른 지역과는 달라졌다. 같은 두 시간 거리를 대할 때 다른 지역은 ‘멀구나’ 하는 맘이 먼저 든다면, 강원도는 ‘그쯤이라면’ 하는 맘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백두대간도 넘지 않는’ 강원도 원주에서의 글쓰기 수업도 선뜻 해보겠다고 나설 수 있었다.
첫 수업을 하러 원주로 향하는 날은 올겨울 최강추위라고 했다. 짧지 않은 낚시 인생에 강원도는 옆 동네처럼 가깝게만 느껴지지만, 사실 강원도의 겨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기상청 예보대로 공기 온도는 차갑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달리는 내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너무나도 화사했다. 히터 온도를 올린 차 안은 포근했는데, 마치 차창 밖의 햇살만으로 그 포근함이 다 채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최강한파의 공기를 채우는 햇살 속을 달리며, 내가 내내 생각한 건 서점 대표님이 내게 보낸 메일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같은 지역의 주민도 아닌 내가 원주로 글쓰기 수업을 하러 가기로 했을 때, “글쓰기라는 특이한 활동을 하는 배경에는 다른 기술이나 지식과는 다른 일종의 ‘우정’이 개입된다고 생각한다‘는 메일을 보내주었다. 나는 메일의 그 문장을 여러 번, 오래 곱씹어 읽었다.
글을 쓰는 언저리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는 몇 년 동안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고, 함께 쓰는 사람들도 여럿 알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건 그림을 그리거나, 운동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 마음을 그대로 꺼내어 보이는 일이므로, 그저 어떤 결과물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을 함께 쓴다는 건, 서로의 마음을 내보이고, 또 주고받는 일이다. 그제야 그간 내가 그들에게 느꼈던, 계산이나 계획에서 비켜선 그 무언가의 느낌이 바로 ’우정‘ ,그것이었구나 싶었다.
창밖 강원도의 겨울은 황량했다. 햇살이 아무리 눈부셔도, 겨울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들. 빛이 바랜 푸른 소나무. 차창을 조금 내렸을 때 밀려드는 얼음장 같은 바람. 원주 시내로 들어섰을 땐 새벽에 잠깐 날렸다는 눈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싶은 두근거림. 함께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싶은 설렘.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절대 가깝지 않은 거리를 가까운 곳을 가듯 즐겁게 가게 되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를 생각했다.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고 내려 서점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엔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서점의 문을 힘차게 열고 성큼 들어섰을 때, 책들의 공간은 햇살처럼 포근한 공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