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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Oct 19. 2023

우리의 알고리즘

                             

‘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가끔 생각한다. 인터넷의 알고리즘 이야기다. 포털사이트에서 무언가를 검색했다면 그 기록이 남아, 종종 그 연관 고리들이 노트북이나 핸드폰 화면에 떠오르곤 한다. 때로는 알아서 챙겨주는 듯 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제 그만 잊었는데 다시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는 ‘나는 너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듯 친절을 가장한 감시로 느껴져 무서울 때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그 알고리즘 덕에 ‘체코 아녜스 님’을 만났다.     


처음 그녀가 내 인스타그램을 찾아왔을 때, 분명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는 ‘플라이낚시’였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뿐이 아니었다. 나의 천주교 세례명은 아녜스인데, 그녀 역시 세례명이 아녜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체코 아녜스 님’이라 부른다.

세례명 아녜스. 마흔의 끄트머리. 체코의 베스키디 산속의 베츠바 개울가에 살고 있다는 그녀. 근처 한국업체의 공장에서, 체코 현지인과 한국인 직원들 간의 각종 소통을 조절하는 일을 한다는 그녀. 해외를 떠돌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 체코의 시골에서 ‘라비’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그럭저럭 잘살고 있다는 그녀.

이곳의 저녁에 그녀는 출근하는 아침 길의 사진을 종종 올렸다. 내가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지 하는 시간이면 그녀는 휴일 오전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근처 강가에서 ‘오스뜨로렛뜨까’라는 희한한 이름의 물고기를 낚는 사진을 올리곤 했다.      


체코 아녜스와 한국 아녜스가 서로의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올리며 소위 ‘인친’이 된 것은 이제 해를 넘긴 이야기다. 내가 미국 서부의 풍경을 올려주면, 그녀는 이집트 홍해의 노을을 보내왔다. 일본의 소도시 나무 등대를 보여주면, 그녀는 몰타섬의 푸른 바다를 보여주었다. 내가 “몰타라면 설마…?” 라고 했더니 그녀는 “네! 바로 몰티즈의 고향 몰타섬이에요.”라고 해서 웃었다. 그녀는 이제 나의 반려견 루비가 몰티즈인 것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이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여행을 공유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는 일상의 풍경도 함께 나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연결고리가 플라이낚시와 천주교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옛 경기도청 앞을 지나며 동네의 목련꽃 사진을 올린 날엔 그녀가 말했다. 사실 아주 어렸을 적에 수원의 그 도청 앞에 잠깐 산 적이 있다고. 아주 어린 날의 기억이라 추억이랄 것은 없으나 창문밖에 목련이 피어있던 것만 한 컷의 사진처럼 기억난다 했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 한 조각을 들었다.

그녀의 엄마는 맵고도 아린 시집살이를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남편과 함께 어린 그녀를 안고 연고 하나 없는 수원으로 도망치듯 떠나와 잠시 살았다고 한다. 그 어린 날 보았다는 목련이 피어있던 창밖 풍경이 그녀가 기억하는 수원의 이미지였다. 그녀에게 수원이 점이라면, 일생의 대부분을 이곳 수원에서 살아온 나에겐 여전한 선이다.      


또한 부산 여행을 하며 피드에 부산의 이곳저곳을 올렸던 날엔 그녀가 어린 시절의 사진을 올렸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그녀는 용두산 공원 앞에서 보라색 공단 원피스를 입고, 지금과 똑같은 보조개를 단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나 역시 부산은 특별하다. 아빠의 근무지였던 부산에서 태어났고, 아빠의 고향이며 나의 고향이기도 한 수원으로 오기 전 짧은 기간 살았지만 내게도 아주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은 곳이다. 마치 그녀가 수원을 목련꽃의 이미지로 기억하듯 나 역시도 골목 어귀의 하늘색 나무 대문이 있던 집의 이미지로 부산을 기억한다.     


인터넷상에서의 인연이란 그렇다. 전부를 믿지도, 전부를 의심하지도 않는 관계. 전부를 내보이지도, 전부를 감추지도 않는 관계. 그런 적당한 거리와 모호한 필터를 끼운 관계가 인터넷에서의 인간관계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체코 아녜스 님도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종종 나의 일상을 올리지만, 그것이 진짜 나의 일상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와 다른 대륙에서 살지만 같은 플라이 낚시꾼인 아녜스가 있다는 것.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같은 곳의 추억을 가진 또 다른 아녜스가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사진 한 장은 하루 24시간 중 1초의 기록이다. 그 1초는 순도 백 프로의 진실인 동시에 뻥 과자처럼 속이 텅 비어있는 1초이기도 하다. 그 1초는 자신의 전부를 나타내기도 하며, 동시에 그저 전부인 듯 보일 뿐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1초의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린다. 그 1초로 굳이 나의 나머지 23시간 59분 59초를 말하려는 생각은 없다. 단지 그 1초 역시 나의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꺼내놓거나 애써 감추는 일에 조심스러워진다. 적어도 그 1초엔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마음은 그 1초의 알고리즘으로 엮인 인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체코 아녜스 님의 일상을 보며 ‘좋아요’를 누른다. 먼 곳의, 다른 시간을 사는 체코 아녜스 님이 내게 눌러준 ‘좋아요’를 본다. 서로의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를 때마다 빨간 하트가 찍힌다. 마치 신화 속 인연을 엮는다는 붉은 실처럼.

이렇게 오늘도 무수히 많은 아녜스들과 오직 단 하나뿐인 아녜스가 점과 선으로 만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고리즘을 엮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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