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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02. 2023

와인 한 잔


                              

컨츄리 캠벨 스위트. 와인레벨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나라의 영동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는데 이름처럼 달달한 맛의, 마치 음료수 같은 와인이라 한 모금 마셨을 때 그만 웃음이 났다. 맛있는데, 이거?


지난주 코엑스에서 열린 푸드페어에서 사 들고 온 와인이었다. 각종 식품 회사에서 나와 부스를 꾸미고, 홍보와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과자, 디저트, 반찬 등의 다양한 코너를 지나치다가 국내에서 생산된 술을 홍보하는 부스 앞을 지날 때 눈에 들어온 그것이 바로, 영동포도와인이었던 것이다. 

충북 영동이 포도가 많이 나는 곳이며, 자체 와인생산지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여러 해 전 이것과는 다른 회사의 영동포도와인을 마셔본 기억도 있으니 어쩐지 지나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술 시음이라니, 하면서 나는 홀짝 맛을 보고 그 맛있음에 순간 반했다. 시음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나란 인간은 역시 맛있는 것에 꽤 약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사실 레드와인의 텁텁한 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마시게 되면 차라리 화이트나 로제 와인을 택하지만 이건 굉장히 깔끔하며, 적당히 달콤했다. 완전 음료수인데…. 싶었다.

어린 시절(이라 쓰고, 사실은 젊던 시절, 그보다는 몇 년 전…. 이라고 우기고 싶어지는 시절)엔 친구들과 모이면 술을 제법 마셨다. 대학생 시절엔 종종 수업을 땡땡이치고 친구의 자취방에 오글오글 모여앉아 소주와 사이다를 타서 마시거나, 막걸리를 마셨다. 그 시절이라면 무얼 어디서 마시든 즐거운 인생이다. 성인의 자유와 사회인의 의무 사이에서 어느 만큼은 비켜선 것이 대학 시절이니까 말이다. 

나이가 좀 들고, 아이들이 컸고, 사는 일은 자리가 잡힐 무렵 친구들은 다시 자주 모였다. 초등학교, 혹은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도 더러 만났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이 당연한 모임도 있었지만, 차 대신 술을, 때로는 밥과 술을 겸하는 모임도 많았다. 그러니 친구들과 종종 술을 함께 마셨다.


술에 관한 한, 나는 타고나길 아빠 쪽 유전자를 그대로 받아 챙긴 딸이 분명하다. 아빠를 닮아 알코올에 꽤 강한 스타일이다. 술을 맛보는 걸 즐기기도 한다. 

소주라면 당연히 소주잔이 아니라 맥주잔에 부어 마셔야지, 하던 사람이 아빠였다. 하지만 아빠도 나이가 들고, 당뇨며 고혈압 같은 지병이 찾아오자 술을 드시지 않았다. 안 마시니 이제 먹고 싶지도 않다고 하시며 늘 식사 자리에선 내 술을 주문해주셨다. 또 자꾸 따라주셔서 매번 엄마의 지청구를 들었다. 

“아니, 뭐 좋은 거라고 가뜩이나 지금도 잘 마시는 애한테 자꾸 술을 줘욧!!!”

가끔 생각해보면 일생 술을 좋아했던 아빠였으니 내 마음을 알아서 먼저 주문해주셨을 테고, 이제 술을 마실 수는 없으나 일종의 대리만족도 조금 있지 않으셨을까 한다. 


나는 가족들과 모인 자리에서 술을 주문할 때,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다. 딸 술잔을 채워주던 아빠도, 애 술 주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모두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나의 시절은, 사랑하는 이들을 뒤에 놓아둔 채 여전히 흐른다. 그러니 나는 계속 나이를 먹고 있다. 

몇 년 전 담석증으로 담낭을 떼고 난 이후 술이 확 줄었고, 지난 3월 넘어져 무릎뼈의 골절 수술을 받은 이후 또 술을 멀리했다. 멀쩡한 정신에 걷다가도 넘어지는데 술 마시고 흥겹게 걷다 보면, 또 자빠질 확률이 높지 않나 싶어 몸을 사렸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어떤 술이든 한두 잔이면 적당하게 좋다. 이왕 한두 잔 마시는 거 달곰하게 맛있는 술이면 더 좋다. 한때 술은 소주지, 하던 사람도 세월 앞에선 이렇게 되는 법이다. 일생 술잔을 내려놓을 것 같지 않던 아빠가 말년에 술을 드시지 않게 된 것이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다. 


어느덧 맛있는 술을 즐기게 된 내가 되었으니, 영동포도와인, 그것도 스위트 와인이 맘에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와인이라면 색깔로나 구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몇십, 혹은 몇백만 원씩 한다는 고급와인은 이름부터 낯설다. 내게 맛보라고 내밀어도 그 진가를 알아볼 수는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뭐든 내 입에 맛있으면 그거로 된 거라고 생각하며 영동포도 와인을 홀짝이는 중이다. 

술뿐 아니라 개인의 취향이란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눠놓은 급이나 구분의 기준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도는 법 아니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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