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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07. 2023

원의 마음

                                        

무릎뼈엔 여전히 나사 몇 개와 와이어가 감겨있다. 물론 손으로 만진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슨 부속품처럼 만져지는 건 아니니, 기다란 흉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잊고 산다. 하지만 계단만 만났다 하면 자동으로 엘리베이터를 먼저 찾게 되고, 신호등이 저 앞에서 초록 불로 바뀔 때면 예전과 달리 달려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릎에 나사가 만져지는 건 아니어도 이런저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 존재감은 실로 엄청나다.     


6개월 만에 병원 진료가 있던 날이었다. 누구는 열 달 만에 나사를 뺐다더라. 누구는 일 년 걸렸다더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사방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래서 아침에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며 내심 의사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까 궁금했다.

무릎뼈에 나사와 와이어가 박혀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신경이 거슬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딱 그 나사를 빼버리고 싶은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한 시간여의 수술이라고 해도 또다시 수술대에 눕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 들며 건망증이 심해지는걸 느낄 때면 혹시 그 전신마취 때문인가 싶은 마음도 드니 이래저래 서글프기도 했다.     


진료 전에 미리 엑스레이를 찍었다. 병원에만 오면 늘 긴장된다. 꼭 피를 뽑지 않아도, 그저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설 뿐이어도 막상 검사실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몸이 굳는 것이다. 

담당의는 엑스레이 필름 여러 장을 꼼꼼히 보았다. 그가 들여다보는 모니터 속 내 다리뼈는 마우스를 클릭하는 의사의 손을 따라 이리저리 회전했다. 뒤로 돌고, 좌우 혹은 위아래로 각도를 틀었다.

" 수술도 잘 되고, 아주 예쁘게 잘 아물었어요. “

딱히 이상을 느낀 건 아니어서 괜찮으려니 했지만, 그래도 담당의가 그렇다고 말해줘야 환자는 안심하게 된다.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사를 빼자고는 하지 않았다. 무릎에 나사가 박혀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신경 쓰인다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나사 박힌 채로 또 넘어지면 분쇄골절이라고 해서 겁이 난다는 내 말에 의사가 크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조심하시면 되지요.“     


그는 일 년 후에 보자고 했다. 나처럼 뼈에 나사를 박은 사람은 수술 후 외상성 관절염을 조심해야 한다며 무려 365일 치 관절 보호제를 처방해줬다. 처방약이야 꼬박꼬박 먹겠지만, 어차피 뛰지도 못하니 뛰어다니지도 않겠지만, 조심하고 주의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살아보니 그렇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일어나며,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무너지는 순간은 있다. 물론 조심하면 다칠 확률이 적은 것도 사실이고, 굳게 마음먹고 있다면 무너지는 순간에도 나를 놓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었을 때 그 의사가 말하듯 대수롭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릎에 나사가 박혀있으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마음과 당장 제거 수술을 하자고는 안 하니 다행이라는 마음이 혼재되긴 했지만, 역시 진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다행이다, 라는 쪽으로 좀 더 추가 기운다. 그 어디가 아프든, 아픈 정도가 약하든 중하든 간에 병원이라는 곳은 별달리 나쁜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곳이니 말이다.      


병원은 집에서 편도 오천 보의 거리다. 천천히 걸어 집 근처까지 왔을 때 빗방울이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했다. 묵직해져 가는 하늘을 보면서 신호등 불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그 순간 내 눈앞에서 비가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첫눈은 점차 그럴듯한 눈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쌓이지는 않겠으나 제법 눈발이 예뻤다. 신호등 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한동안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는 걸 바라봤다. 찬 바람이 불더니 이제 눈이 내린다. 진짜 겨울인 건가. 이렇게 한해의 끝으로 가는 건가 싶다.      

신호등 불이 바뀌고 다시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다시 일 년을 함께 할 내 무릎 속의 나사를 떠올릴 때면 용기가 조금은 줄어드는 나를 생각했다. 동시에 그들 도움으로 이렇게 오천 보쯤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의 첫눈과 한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생각했다. 


어쩌면 살면서 필요한 건 이런 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시작과 끝이 있는 선분의 마음이 아니라, 끝이며 동시에 시작이기도 한 원의 마음 말이다. 이래도 저래도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잠깐 눈 풍경에 감탄한 나는, 다시 뚜벅뚜벅 저만치 앞에 보이는 내 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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