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피어나
산책을 좋아한다고, 혼자서 길을 걷는 그 재미가 좋다고 말하면서도 한겨울엔 늘 추위 핑계를 대며 나서지 않았다. 추우면 온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아. 빨리 날이 따뜻해지면 좋겠어. 이런 말들을 하며 거리로 나서는 대신 창밖을 보곤 했다.
추위를 핑계 삼지만 그래도 매주 평일 하루 성당에 가는 일만큼은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미사가 끝나면 추워, 추워…. 소리를 입에 달고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지만, 어느새 3월도 반을 달려왔다. 이제 그간 미뤄두었던 산책을 다시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봄 햇살이 화사했다. 온몸에 살짝 레이스를 덮은 것 같은 얇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천천히 걸었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하지 못한 일을 생각했다. 그것들은 두서없이 하나씩 아무 데서나 튀어나왔다.
골목을 돌 땐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일들을 떠올렸다.
길을 건너면서는 하고 싶지만 해낼 수 있을까 자신 없는 일이 선명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의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어떤 것은 제일 앞에, 또 어떤 것은 저만치 뒤쪽 파일에 넣어두었다. 역시 내게 있어 머릿속 정리의 시간을 갖는 데엔 산책만 한 것이 없지, 혼자서 끄덕끄덕했다.
사실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 오히려 산책하는 동안 두 번의 메일 알람이 울렸고, 그 메일엔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식만 들어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이 더 복잡했을 것이다. 의기소침해지고 절로 마음이 심드렁해져서 산책길의 걸음마저 점차 느려졌다. 그때였다.
무심한 눈길을 길가 화단 쪽으로 돌렸을 때, 거기 가지에 온통 초록 물이 올라 연둣빛이 선명한 철쭉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꽃망울도, 아기 잎도 돋지 않았지만 초록 가지에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것은 금방일 것이 분명하다.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보니 어느새 양지바른 언덕엔 파릇파릇한 새싹도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지. 봄이지. 봄이 오면 어찌 되었든 싹은 트는 법이지.
멈춰서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계획했던 일은 거절의 메일로 돌아오고, 꿈꾸었던 일들은 부서지듯 사라진 아침에도 이렇게 봄은 오는구나 싶으니 어쩐지 끝난 것은 끝난 것이 아니고, 닫힌 문은 닫혔을 뿐 잠기지는 않은 게 아닐까 싶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시간여의 산책을 끝내고 집 근처의 무인카페에 들어갔다. 테이블 네 개짜리 작은 카페엔 아무도 없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문득 게시판을 봤다. 벽에 붙은 게시판에는 손님들이 이런저런 낙서 한두 마디를 적어서 붙이고 간 노란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반 배정 주옥같다.
녹차라테 두 번 마셔요, 세 번 마셔요.
나는 혼자 있어요. 또 올게요.
요정 사장님 안녕하세요. 뵌 적 없으니 요정이라고 부를게요.
읽으며 웃음이 나기도,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벽에 가득 붙은 그 노오란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삐뚤빼뚤한 초등학생 글씨도 보이고, 수준급의 그림을 그려 넣은 이도 있었다. 더러는 취업에 성공했어요, 시험 잘 본 것 같아요. 이런 글도 있어 혼자서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포스트잇의 낙서를 보는 동안 커피는 식었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퉁이를 돌아서니 남쪽을 바라보는 아파트 화단에 줄지어 선 개나리 가지 끝에 노란 꽃망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드문드문 노란 점을 찍어놓은 듯 선명한 그 꽃망울들을 봤다.
더디게 다가오는 것 같아도, 고개를 들어보면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코앞에 와있을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날의 봄은 마치 벽에 가득한 노란 포스트잇처럼 피어날 것이다. 소소하고 자잘한, 웃음나면서 뭉클한 크고도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말이다.
그렇지. 글이란 건 그런 거였지.
심드렁하게 기가 죽었던 마음에도 개나리 꽃망울 몇 개쯤은 맺혔다. 봄에 글이 피어나는 것인지, 글이 봄처럼 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어느 쪽이든 어떠랴 싶었다. 무엇이든, 곧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