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리틀 다이어리
원래 늦잠을 자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눈이 떠진 새벽에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잠은 달아나고, 머리는 오히려 깨어 맑아졌다.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고, 성경 필사도 했다. 다이어리 앱엔 그날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하다. 그 목록 중에서 묵주기도와 성경 필사 항목을 삭제했다.
전에는 수첩 다이어리를 썼다. 연말이 되면 다가올 새해의 다이어리를 산다는 핑계로 문구점을 드나들었다. 예쁘고, 크기도 부담스럽지 않으며, 구성도 맘에 쏙 드는 다이어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다꾸’라고 하는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다. 그처럼 다이어리 꾸미기에 열을 올려본 적은 없으나 늘 맘에 딱 드는 다이어리를 찾아 헤맸다.
우리 생활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비대면이 당연해지고, 아날로그의 향수보다 디지털의 편리함이 앞서는 시대가 되었다. 나 역시 아날로그의 향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새로운 것들이 주는 여유와 즐거움도 함께 누린다. 어차피 기준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은 내일의 아날로그이며, 내일은 모레의 향수가 될 것이니까.
이런 나는 언젠가부터 앱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 물성이 없다는 서운함이 있긴 하지만 앱 다이어리의 장점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수정과 삭제가 쉽고 깔끔했다. 별도로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핸드폰이나 아이패드에서, 혹은 컴퓨터 화면에서 늘 동기화를 통해 같은 다이어리를 펼쳐 들 수 있었다. ‘다꾸’의 맛을 느끼기엔 부족하지만 나름 이모티콘을 이용해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도 어느 만큼은 가능했다. 앱 다이어리로 넘어 온 이후에도 가끔 한 번씩 6공 다이어리에 눈이 갔지만 결국은 다시 앱으로 돌아왔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니지 않는 나의 앱 다이어리에 적힌 매일 할 일 목록은 사실 별것 없다. 기도와 필사 외에 산책, 실내자전거 타기, 에세이쓰기, 글쓰기 모임 같은 개인적인 것이거나 은행 이체 일정이나 도서 반납 기일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더한다면 원고 마감 일정이나 공모전 같은 것들이 빨간 별표를 달고 나를 자극한다.
예전에는 그 목록들을 완수하고 나면 줄긋기로 완료 표시를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매일 할 일 목록을 완료하고 나면 그 항목은 아예 삭제해버린다. 그래서 내 다이어리에 오늘 이전의 칸은 늘 공란이다.
이런 나의 방식을 듣고 지인이 말했다.
"남겨둬야 지난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억할 것 아니에요."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지난 일을 지워버리고 나면 가끔씩 궁금해지는 일들이 있다. 내가 지난달에 머리를 며칠에 잘랐더라. 혹은, 그 친구를 만났던 게 언제였지.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그날의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면 목록에서 지웠다. 끝난 일은 미련 없이 삭제했다. 그뿐만 아니라 삭제하고 난 깔끔한 하루의 공란을 위해 할 일을 부지런히 했다. 그리고 다시 맞은 새로운 날엔 다이어리의 오늘 칸에 채워진 목록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지나갔으므로 공란. 오늘은 다시 시작이다.’
오늘 이후로 빼곡한 다이어리의 할 일들을 본다. 여전히 별건 없다. 매일의 루틴인 필사, 묵주기도, 산책. 그리고 도서 반납, 과제…. 따위의 소소한 일들. 물끄러미 오늘의 소소함을 본다. 이런 소소함이 모여 만들어지는 내 인생을 생각해본다. 소소함이 모였다고 해서 내 인생이 소소할 리는 없다. 나에게 내 인생은 소중하다. 그러니 오늘도 소소함이 탑처럼 쌓여질 내 인생을 씩씩하게 시작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