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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y 07. 2024

도동서원의 은행나무

                               도동서원의 은행나무     


“도장 찍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의 스탬프투어를 시작했다는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이 웃었다. 

몇 해 전 찾아온 코로나의 대 암흑기. 어디로도 떠날 수 없던 그 시절 동안 나는 항공권을 검색하는 대신 전국 방방곡곡에 숨은 천주교 순례지를 돌았다. 차가 갈 수 없는 산꼭대기 동굴을 헉헉대며 걸어 오르고, 제주도에서도 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추자도까지 찾아가 167곳의 순례 도장을 모두 찍었다. 완주증을 받기까지 꼬박 2년 반이 걸렸었다.

친구들 말대로 도장 찍기에 진심인 나답게 이번에는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에 80여 개의 스탬프를 받는 투어를 시작했다. 지난번 천주교 순례지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주로 문화유산을 따라 전국 일주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의 대구 출장길에 동행하기로 한 건 근방에 스탬프를 받을 곳들이 있어서였다. 말이 대구지, 실제로는 현풍인 출장지에서 1박을 한 후 토요일 아침 일찍 한적한 현풍 시내를 벗어났다. 현풍은 말끔한 도로에 차들의 통행은 적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푸른 산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사는 수원에서 눈을 돌려 볼 수 있는 풍경은 대부분 아파트며, 빌딩이다. 늘 고개를 들어 산의 색감이 변하는 걸 보며 사는 삶을 잠깐 생각했는데 영 꿈이려나.     


이번 스탬프는 도동서원에서 받아야 했다. 도동서원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이었다. 서원이라면 도산서원, 병산서원 같은 주로 안동지역의 서원이 익숙했는데, 그러고 보니 안동 외의 서원은 처음이었다. 

다소 낯선 이름이었지만 알고 보니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 초기인 1568년에 창건되었고,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곳이었다. 이름인 '도동(道東)'의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라는데, 전국 5대 서원으로 꼽힌다고 하니 제법 유서 깊은 서원이었다.      

사전지식은 거의 없이, 그저 도장 하나 찍겠다고 갔는데 의외로 큰 규모의 주차장과 건너편의 멋진 호수경치, 그리고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서원의 엄숙함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였다.

서원 건립을 기념하여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인 정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사실 단순히 ‘거대하다’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엔 가당치 않다. 이미 사백 년도 훨씬 넘은 늙은 나무는 가지를 사방으로 뻗었다. 하늘로 쭉쭉 힘차게 뻗은 것이 아니라 굽고 휘어져 어떤 가지는 하늘로, 또 어떤 가지는 땅에 눕다시피 해서 지지대를 받쳐두었을 정도였다. 나는 기이하게 크고 거대한 그 나무 앞에서 어쩐지 숙연해졌다. 마치 노구(老軀)를 이끌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선비 앞에 선 기분이었다.     


서원은 언덕 위에 있다. 그 마당에 서면 건너편 호수가 나무 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도산서원도 이처럼 호수 전망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이처럼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 공부가 되었으려나. 이런 곳에선 공부가 아니라 독서를 해야 맞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른 아침의 서원은 고요 속에 잠겨있고, 지나는 차들조차 거의 없는 시골엔 소음이랄 것이 없는 평화로운 공기가 가득했다. 서원의 강학당 마당에 한동안 섰다가 내려오며 다시 거대한 은행나무를 마주했다.

그 아래 벤치에선 동네 어르신들 몇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구네 집 자식이 왔다더라, 친구 누구는 여행을 갔다더라 하는 소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잡담이 오갔다. 나는 팔 벌린 은행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푸른 은행잎으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온통 노랗게 물드는 가을을 상상했다. 많은 곳을 다니지만 멋진 풍경이라고 해서 모두 다시 와보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은행나무라면, 그 장관을 꼭 다시 와서 보고 싶다는 맘이 들었다. 

“가을에, 이 은행나무가 물들 때 다시 와서 보자.”

옆에 앉은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지 뭐” 

흔쾌히 대답하는 남편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백 년을 훌쩍 넘은 나이를 먹도록 이 은행나무는 이 자리에 서서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들, 다음을 기약하는 말들을 들었을까.

가을이 되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다시 오자는 약속은 어쩌면 남편에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은행나무에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같은 약속을 한 것이 나 하나뿐이었을리도 없다. 다시 보러 오겠다는 수많은 약속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살아왔을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는 내내 어쩐지 처음 목도했을때처럼 다시 숙연해졌다. 5월의 푸른 은행나무를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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