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작고 소박한 식탁 같은 책을 펴내고 싶다는 건 오랜 바램이었다. 평생교육원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끼리 문집을 발행했을 때, 그리고 도서관 강좌에 모인 이들의 글이 실린 책을 받았을 때. 그럴 때마다 늘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함께 하는 이들의 다정한 글이 모이는 일이 자연스러운 공간을 열고 싶다고.
물론 글을 쓰는 일의 최종목적지가 반드시 출간인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 모두가 작가가 되고, 자신의 책을 내고자 하는 목적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누구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순수하게 쓰는 행위에 즐거움을 느껴서 쓴다. 또 다른 누구는 책을 내고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쓴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꿈꾸었으나 늘 핑계이면서 사실이었던 한마디는 ‘바빠서’였다. 뒤늦게 부지런히 쓰는 사람이 된 것은, 더 이상 미룰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은퇴하면’,‘나이 들면’,혹은 ‘죽기 전에’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언젠가는 다가올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정말 은퇴의 날이 찾아오고, 나이가 많이 들어 기력이 없어지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일을 실감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나도 그랬다. 다만 어렴풋이,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구나! 생각한 건 부모님의 연이은 죽음이 계기였다.
오래 해온 일을 그만두고 이곳저곳에서 출판 강좌를 들었다. 뭐 하나만 실수하면 우르르 오류가 나버리는 인디자인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도 어려웠지만, 인쇄와 마케팅 같은 일련의 과정이 더 자신 없었다.
전자책 출판 강의를 듣기 위해 일주일 내내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애증의 sigil 프로그램뿐 아니라 전자책을 늘 읽으면서도 그것이 Epub 파일인지조차 몰랐던 사람에겐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용산역으로 향할 땐 늘 한강 변으로 걸었다. 해가 강물 속으로 스며드는 걸 바라볼 때마다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은 ‘괜히 시작을 해서….’라며 후회했고, 어느 날은 ‘적어도 후회는 없겠지….’라는 말로 자신을 다독였다.
우연히 이년 가까이 매달 필진으로 참여했던 웹진 ‘2w매거진’ 덕분에 내 글이 어딘가에 실리고, 매달 마감이 있는 삶을 사는 경험을 했다. 또한 오래도록 품었던 ‘소박한 식탁 같은 공간’에 대한 꿈을 되살려볼 수도 있었다. 이런 거였지, 잊고 있었지만 내가 오래 간직했던 것은.
하지만 이제 2w매거진은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성실하고 꾸준한 글쓰기의 원동력을 얻은 나는 계속 열심히 쓰는 사람으로 남았다.
그 덕에 나와 글쓰기로 연결된 사람들의 글을 모아 웹진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종이의 물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긴 하지만 소수의 인원이 계간으로 시작하기엔 웹진이 가장 적합했다. 한 발을 내딛으면 끝까지 걷는 사람이지만, 유독 그 한 발을 내딛는데 망설임이 많은 사람인지라 선뜻 나서질 못했다. 이름이 결정되면, 방식이 결정되면, 함께 할 사람이 결정되면…. 늘 결정을 기다리는 일은 많았고, 그것들은 모두 미루는 좋은 핑계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쓰임’이라는 이름이 찾아왔다. 더는 미룰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쓰고, 글은 쓰인다. 사라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고, 우리가 쓴 글들이 모인 소박하고 다정한 식탁을 열어보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첫 번째 쓰임’에 몇 분이 참여해 주셨다. 원고료도 드리지 못하는 송구스러움을 이해해 주신 분들 덕에 어설프지만 ‘첫 번째 쓰임’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두 번째 쓰임’엔 다소 필진의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쓰임’의 첫째 조건은 ‘쓰는 이의 희망’이다. 건네는 모든 말에 누구나 응답한 건 아니었다. 모든 일엔 각자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나서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다정한 눈빛으로 봐주는 사람들, 모자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리 없는데 늘 잘하고 있다고 해주는 사람들. 나는 그들 덕에 다음번 ‘쓰임’을 또다시 준비한다.
나 역시 다른 곳에서 얻었던 용기를 생각하며 누군가 오래 쓸 에너지를 얻어가는 식탁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해준 이들 덕에 ‘쓰임’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그들이 내게 식탁을 차려주고, 숟가락을 쥐여준다. 결국 함께 둘러앉은 이들 모두가 서로에게 수저를 쥐여주고, 음식을 내밀어 주는 것이다.
‘쓰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이 쓰이는 일이나 쓰이는 곳’을 말한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이 아닐지라도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나누는 자리가 곧 ‘쓰임’이며, 우리 모두 함께 엮어내는 글들이 곧 ‘쓰임’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오래도록 이 정겨운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글을 나누었으면 한다. 다음의 ‘쓰임’은 좀 더 풍성하고, 좀 더 다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