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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05. 2024

가야 고분군, 그 사이로

                           가야 고분군(伽倻古墳群), 그 사이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고,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살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 누구를 만나는 일도 조심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어딘가로 늘 떠날 궁리를 하던 나는 막힌 하늘길 대신 국내의 167곳이나 되는 천주교 순례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산속 마을의 성지를 찾아가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고 돌아서도록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스탬프 북을 다 채우는 데엔 2년 반이 걸렸다.      


나는 지금도 코로나의 광풍이 부는 동안 내가 찍은 167개의 천주교 순례지 도장을 가끔 본다. 그 팬데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뚜벅뚜벅 걸었던 발자국과도 같다.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얼마 전 우연히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투어’를 알게 되었다. 2년 반의 발자국을 남기는 그 즐거움을 이미 경험한 나는 그만 솔깃했다. 인기가 많은지 여러 달을 기다려서야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짜 여권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76개소를 방문하고 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사찰, 서원, 왕궁 등 주제별로 묶인 코스는 내가 지난 팬데믹의 기간 동안 다닌 천주교 성지와는 또 다른 역사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다.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도 있지만,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과연 일부러 찾아갔을까 싶은 낯선 유적지도 많다.     


여름의 끝자락, 8월 마지막 주의 날씨는 뜨겁고 무더웠다. 차 안의 에어컨도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경주에서 시작해 양산, 고성, 합천 그리고 창녕, 함안 등을 3박 4일간 도는 동안 대부분의 목적지는 신라 시대 유적인 경주의 대릉원을 빼면 모두 가야의 고분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 근처엔 정조와 사도세자의 융건릉이 있다. 소풍 가기에 만만한 곳이었고, 아이를 키울 땐 데려가서 맘껏 뛰어다니게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왕의 무덤은 엄숙하다기보다는 가깝고 편한 곳이었다.      


3박 4일의 대부분을 채운 가야 시대의 고분군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유명한 왕의 무덤도 아닌, 그저 가야의 고분을 보겠다고 이 멀리까지 내려올 일이 있었을까. 경남 고성도, 창녕, 함안도 먼 곳이지만 내겐 신라, 고구려, 백제도 아닌 가야는 그보다도 더 멀고도 먼 나라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무섭도록 뜨겁고 환한 태양 빛이 쏟아지는 푸른 고분군을 바라보는 내내 눈이 시렸다. 매끈하게 깎아놓은 고분군의 부드러운 능선들을 바라봤다. 그것은 구불구불 어느 한군데 막히거나 모나지 않고 이어진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조형물 하나가 없으므로 그늘 한 점 없이 시야는 아주 멀리까지 트여있었다.     


대부분 고분군 바로 앞에는 박물관이 함께 있었다. 휴가철을 지난여름 끝 무렵의 평일. 신라, 백제처럼 되지 못한 가야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은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전시관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들의 무덤,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야 고분군(伽倻古墳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었고, 특히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라는 널무덤, 덧널무덤 등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도 있었다. 서기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사람들이 만든 칼이며, 그릇들. 그리고 그들의 무덤을 발굴할 당시의 여러 사진 자료들도 제법 알찼다. 밖의 뜨거운 사우나 속 같은 공기와 달리 박물관 내부는 서늘했는데 텅 빈 박물관은 어쩐지 조금 쓸쓸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은 총 7개인데, 그중 내가 이번 여행에서 돌아본 곳은 다섯 군데였다. 고분군 다섯 개를 빼고도 경주의 대릉원 주변을 보았으니 이번 여행은 가히 무덤 투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끊어진 듯 보여도 끊어진 것이 아니며, 사라진 듯 보여도 이어져 늘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오래전의 이야기는 이제 빛이 바래고, 금이 갔으며, 귀퉁이는 부서져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것은 없다. 결국 역사란 죽음의 이야기인 걸까.

고분군도 그렇다. 그것은 결국 무덤들이 모인 장소, 즉 지금으로 말하면 공동묘지다. 공동묘지라고 하면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지고,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길 것 같은 긴장감도 있다. 하지만 찾아간 고분군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런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천년도 훨씬 넘는 오랜 세월이 흐른 가야인의 무덤. 분명 무덤이지만 무덤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뭐였을까. 내가 거기 누운 그들을 모른다는 게 이유일까. 아니면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어서일까.      


부드럽고 푸른 곡선의 잔상으로 남은 하루를 보내고 나는 부모님의 묘소에 갔다. 추석을 두어 주 앞두고 있으니 대전 현충원에는 성묘객들이 꽤 많았다. 부모님과의 이별을 생각했다. 펄펄 끓는 것 같은 온도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져 간다. 마음의 파도도 매번 다르다. 어느 해는 적당히 미지근하다. 어느 해엔 잔잔하게 강물처럼 마음이 흘러간다. 처음과 변함없이 들끓는 마음이란 건 없구나 싶은 생각을 할 때, 나는 텅 빈 박물관에서처럼 어쩐지 쓸쓸해졌다.

성묘를 마치고 나오며 현충원 경내에 수없이 많은 비석을 봤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죽음이라는 감정은 휘발되고 사망이라는 사실로만 남게 되는 것일까. 덤덤해지고, 무심해지는 것일까. 돌아오는 내내 가야인들의 오래된 무덤들의 부드러운 곡선을 떠올렸다.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며, 애틋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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