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은 날과 안 먹은 날의 차이
아빠는 몸에 좋다는 약이라면 온갖 좋다는 것을 다 찾아드시는 사람이었다. 어딘가 탈이 났을 때도 습관을 바꾸기보단 약부터 먹는 쪽을 택했다. 반면 엄마는 극도로 약을 싫어했다. 머리가 아프면 카페인이 든 커피 한잔을 마셨고, 감기는 약을 먹어도 안 먹어도 아픈 법이라며 생강차를 마시며 며칠을 끙끙 앓았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과장은 믿지 않았지만, 흉물스러운 것으로는 꿈에 보일까 겁날 정도였던 뱀술이며, 굵은 인삼이 여러 개 들어있는 오래된 인삼주도 집에 있었다. 엄마는 밖에 나가 마시고 오는 술도 지겨운데 집에까지 끌어들인다며 아빠를 타박했다.
사슴뿔을 자르는 날, 친구들과 함께 사슴농장에 가서 그 피를 받아마신다는 아빠를 따라간 일도 있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 흡혈귀 같아!”라며 소리를 질러서 아저씨들이 다 함께 웃었던 기억. 아빠는 내게도 요구르트를 섞어주며 마시라고 해서 질겁을 했었다. 아마도 그날을 기억하는 건 아빠 입가의 붉은 사슴피 때문이 아니라, 내게도 먹으라고 자꾸 내밀던 그것을 정말 먹어야 하나 겁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사라고는 없었지만, 일생 술을 사랑했던 아빠에게도 술잔을 입에 대지 않는 날들이 찾아왔다. 나이가 들며 이런저런 병명이 붙고, 드시는 약이 늘어가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내게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아빠가 따라주는 술을 꿀꺽꿀꺽 마셨고, 엄마의 타박을 함께 들었다.
“아니, 운전해야 하는 애한테 왜 자꾸 술을 줘요!”
“느이 아빠가 일생 술 마시던 것도 지겨운데, 뭐 좋은 거라고 너까지 따라 마셔!”
혈압, 당뇨에 이어 치매까지 시작된 아빠의 약은 점점 늘었다. 하루에 한 번 먹는 약, 두 번 또는 세 번 먹는 약. 그 복용법도 다양한 약들을 제때 먹는 게 쉽지 않은 날들이 왔다. 치매가 오기 전의 아빠는 매일 책상에 앉아 혈압과 당뇨 수치를 재서 기록했다. 마치 암호처럼 숫자들이 빼곡하던 작은 수첩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더 이상 아빠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지난 기억은 자꾸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은 남아있지 못하고 흩어져갔다.
‘약만 먹고 살라고 해도 신날 거야’라며 엄마가 타박하던 아빠의 약사랑은 그 정확한 복용법도 포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빠는 먹은 것을 잊었으므로 두 번 세 번 다시 먹었고, 반대로 꼭 먹어야 하는 것은 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궁리하던 끝에 결국 인터넷에서 약봉지를 샀다. 약국에서 주는 것과 똑같은 그 약봉지에 그날 드셔야 하는 약들을 모두 넣고 밀봉했다. 봉지마다 날짜를 일일이 다 써놨다.
“아빠! 오늘 날짜 있는 것만 드셔야 해. 다른 날짜는 절대 드시면 안 되는 거예요.”
신신당부했지만 그래도 간혹 날짜를 확인하지 않고 약봉지를 비우기도 해서 기겁했다.
부모님이 함께 아프던 때에 나는 가끔 오래전의 뱀술을 생각하곤 했다. 징그럽고 무섭다는 우리들의 아우성으로 양주 진열장의 제일 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그 뱀술. 독사 세 마리가 들어있던 그 술을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약이라며 아빠가 들고 왔던 오래전,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떨었다. 내다 버려라, 종이로 가려놔라, 다들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 뱀술이 여전히 있었더라면, 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 말은 어쩌면 사실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었을까 괜히 후회하면서 말이다.
두 분이 떠나시고, 어느새 나도 차곡차곡 나이를 먹는다. 부모님의 일이라고만 여기던 환갑이며 칠순 같은 단어들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닌 나이다. 건강 역시 한창 젊은 시절과 같을 리가 없다. 나는 술에 관해서라면 아빠 쪽이었지만, 약에 관해서라면 아빠보다는 엄마 쪽에 가깝다. 물론 엄마처럼 극도로 약을 피하진 않지만 되도록 먹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이런 약에 대한 마음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몸에 좋다는 영양제라도 굳이 성실하게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영양제도 약인데 먹는다고 다 좋아질까. 좋다는 것을 그리 챙겨 먹는다고 모두 다 장수하는 것도 아닌데, 한다. 주변에는 이런저런 비타민을 한주먹씩 먹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먹는 날보다 안 먹는 날이 더 많다.
반면, 통증에 관해서라면 다르다. 언젠가부터는 아픈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며칠 아픈 것보다는 약을 먹고 하루만 아프고 싶다는 마음이다. 내가 백 살까지 살지 말지도 모르는데 굳이 아픈 것을 참아야 할까.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아프지 않으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바라는 것이다.
TV 속 비타민 광고를 봤다. 함께 야근하고 돌아가는 두 직원의 얼굴은 극과 극이다. 한 명은 피곤함에 지친 얼굴이며, 또 한 명은 늦은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활기찬 얼굴을 하고 있다. 그때 잘생긴 배우가 비타민 병을 들이밀며 말한다. “먹은 날과 안 먹은 날의 차이를 느껴보세요!”
약을 먹는 일에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 별 희한한 것을 다 찾아드시고, 영양제 사랑도 지극했던 아빠지만 팔순을 겨우 넘겼다. 약이라면 질겁을 하며 자연치유를 택했던 엄마 역시 팔순을 맞지 못했다.
건강검진도, 영양제를 챙겨 먹는 일에도 나는 느슨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관해서라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믿는 것이 이런 느슨함의 핑계이다. 반면 살아있는 동안 아프고 싶지는 않으니 눈에 염증이 생겨 불편하거나, 두통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혹은 감기가 시작되려나 싶은 순간이면 여지없이 약부터 입에 털어 넣는 사람이기도 하다.
‘먹은 날과 안 먹은 날의 차이’를 굳이 경험하게 되는 순간은 역시 내가 불편하고, 힘든 순간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그저 백세시대만을 꿈꾸지는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약이 필요 없는, 아니 약을 찾지 않는 나날이 오래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