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 친구들과 셋이 마곡사에 갔었다. 수원에서라면 가기 좋은 다른 곳도 많았을 텐데 왜 우리는 뜬금없이 마곡사에 갔을까. 심지어 그때 함께 갔던 친구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들의 교집합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때의 우리들은 대체 마곡사까지 무얼 타고 갔던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공주에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세월이 지나고 나니, 마곡사 계곡에서 물놀이하던 하루와 단청이 다 벗겨진 지 오래된 마곡사의 절집에 대한 기억만이 남았다.
이른 새벽 무렵의 미세 먼지와 안개를 구분하기 어려운 탁한 공기가 사라지고 나자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랬다. 과연 겨울인가. 겨울은 이제 가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과 기대를 품어볼 만큼 포근했다.
날이 좋은 계절이었다면, 평일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절 바로 입구 주차장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진입로는 계곡을 따라 달렸는데, 오가는 차가 없었기에 드라이브하는 느낌이 꽤 좋았다. 진입로를 지나는 내내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계곡에 눈길을 보냈다. 오래전 스무 살의 아이들이 계곡에서 물놀이하던 그 하루를 떠올리면서.
마곡사는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에 자리 잡은 조계종의 사찰이다. 신라의 선덕여왕 9년인 서기 640년에 창건된 절이라니 참으로 오래된 절이다. 지금의 마곡사, 특히 내가 좋아하는 대광보전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지고, 1823년(순조 13년)에 다시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이곳 마곡사 일원은 2018년 6월 30일에 전국 각지의 산사들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내가 오래전에 한번 다녀왔을 뿐인 마곡사를 오래 기억했던 건, 바로 거의 흔적이 없이 단청이 벗겨진 절집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였다. 절이라고 하면 당연하게 볼 수 있는 단청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단청이 없었던 것일까 싶을 만큼 마곡사의 대광보전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화재는 보수하며 이어진다. 봄처럼 따스한 겨울 아침, 마곡사 경내를 향해가면서 나는 그 단청이 궁금했다. 거의 지워져 버린 그 단청을 새로 단장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단청은 그저 보기 예쁘게 장식하는 용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나무에 단청을 칠함으로써 비바람에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쯤엔 마곡사도 지워진 단청을 보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한 건 말 한마디 없이,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오랜 세월을 보여주는 그 절집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건너는 돌다리를 만났다. 백범교라고 했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젊어 한때 머문 인연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그 백범교 건너편에 마곡사 절집들이 보였다. 춥지 않은 겨울 공기는 어깨를 펴게 하고, 눈 부신 햇살은 제법 따스해서 가끔 걷다 멈춰서서 눈을 감아보게도 한다. 마곡사 앞마당엔 얼었던 흙이 군데군데 녹아있었다. 아직 봄은 이르지만, 어쩐지 봄을 꿈꿔보고 싶은 날씨랄까.
절 마당의 5층 석탑을 한동안 올려다보다가 대광보전 건물 앞에 섰다. 아. 혼자서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마곡사의 대광보전에는 단청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화려한 단청을 다시 입히며 보수작업을 했으면 어쩌나 했던 것은 기우였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살아낸 마곡사의 대광보전은 여전했다. 내가 스무 살 적 보았던 그날 이후로 세월이 또 많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마곡사의 대광보전은 꼿꼿했다. 마치 오랜 세월 수행하며 나이 든 노승 같은 분위기 그대로였다.
대광보전 앞에서 한동안 지붕과 처마, 그리고 옹이 진 기둥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절 마당의 의자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계셨다. 간혹 함께 웃음이 터졌다. 백범교를 다시 건너다 다리 중간에 서서 겨울의 계곡물이 흐르는 것을 물끄러미 봤다. 마곡사 계곡물은 얼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을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제 그들 모두와 인연이 끊어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모든 인연이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은 물론 아니다. 다만 사람의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하던가. 하지만 나는 가끔 그들이 궁금하다. 어쩌면 아직 유효기간이 남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천천히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길은 막히지 않았고, 길 위에서 하루는 참 길고 느슨했다. 마곡사는 봄이 유명하다고 한다. 어느 봄날에 다시 마곡사를 찾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