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의 밤
잘 알고 있다고, 이미 모두 안다고 생각한 것들의 다른 모습, 혹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할 때의 신기함은 오래 남는다. 내게는 경포대가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경포대라면 내게는 당연히 해수욕장이었다. 어린 시절에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던 기억으로 남은 곳.
그 이후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이다. 아마 그즈음에 경포대의 진실을 알았을 것이다. 경포대가 사실은 언덕 위 누각의 이름이며, 그 경포대 덕에 해수욕장 이름이 경포대해수욕장이 된 것이라는걸. 말하자면 늘 이야기해 온 ‘경포대’ 해수욕장의 ‘경포대’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천해수욕장의 ‘대천’과 같은 듯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언덕 위에 선 누각이다. 경포대에서 바라보면 넓은 경포호와 멀리 바다도 보인다. 경포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라면 아마도, 경포대에선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이렇게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경포대는 상상만으로도 꽤 낭만적이다.
늘 지나가며 훑어보는 곳이었던 경포대에서 2박 3일을 묵기로 했다. 바다와 호수를 나누는 좁은 길목에 우뚝 선 독특한 외관의 호텔 스카이베이.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처럼 두 건물이 루프탑으로 연결된 모양새의 건물인데 가운데를 뻥 뚫어두고 ‘바람의 길’이라 이름했다. 호수 쪽에서 선 채 호텔의 위용을 바라보자면 ‘이건 어쩌면 진짜 바람의 길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호수와 바다 사이 그 좁은 통로에 이리 큰 호텔 하나가 덜렁 서 있는 형태인데, 호수와 바다를 넘나드는 거센 바람을 생각하면 안전상 이런 구조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접어둔 채 ‘바람의 길’이란 이름만을 생각해도 꽤 낭만적이다. 그리고 보면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경포대는 멋진 이름과 스토리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경포호수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호수가 이렇게나 넓었던가. 늘 잠깐 머무를 뿐 경포의 참모습을 오래 본 경험은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대학 2학년쯤이던가, 그 시절 경포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백사장에 철조망이 있었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아마 신기해할 것이다. 스무 살짜리 열서너 명이 경포에 놀러 와 밤새 술을 마시고는 술김에 일출을 보자고 민박집을 나섰다. 철조망 앞 백사장에 누운 채로 해가 뜨기를 기다리다 모두 술김에 잠이 들었다. 하나둘 깨어보니 주변에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오가며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던 기억. 그때의 그 민망함조차 즐겁고 유쾌한 추억으로 남았다. 스무 살이었으니까.
그 이후 경포에서 묵어가기로 한 건 처음이다. 오늘 내로 되짚어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은 경치도 다르게 보게 하고, 시간도 다르게 느끼게 해준다. 모든 것이 천천히 지나가고, 느리게 흐르는 마법이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경포호를 돌았다. 경포에 처음 온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나 경포호수가 큰 줄을 처음 알았다. 둘레길 일부를 걷는 것으로 경포호 산책은 마무리한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 생각은 하지 않지만, 지나가는 자전거에 눈길을 줬다. 2인승에서 6인승까지 다양한 자전거들이 돌아다녔다. 가족끼리, 혹은 연인이나 친구끼리 페달을 굴리며 다들 웃었다.
밤엔, 달이 다섯 개라는 경포호에 달은 뜨지 않았다. 내내 흐렸다. 당연히 붉게 타오르며 솟는 해도 보지 못했다. 아쉬웠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이 나이쯤 되면 안다. 흐린 구름 속에도 달은 있고, 수평선 가까이 내려앉은 구름 속에도 뜨는 해는 있다는걸. 물론 안다고 해서 ‘전혀’ 아쉽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걸 안다면 그리 서운하지만은 않다.
달은 볼 수 없지만 구름 속 저 깊이 어디쯤 달이 있으리라는 상상으로 어두운 경포호를 내려다봤다. 깊은 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떠오르는 오래전의 기억.
잘 알고 있다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경포의 다른 모습을 본다. 어둠이 내려앉은 경포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이렇게나 경포호가 넓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