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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카곶

by 전명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호카곶의 표지석에 새겨진 건 포르투갈의 유명한 작가인 카몽이스의 싯구라고 한다. 옛 유럽 사람들이 땅끝이라 믿었다는 호카곶. 그 앞엔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대서양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막힌 곳 없는 자리에 바람은 세차게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둔 음악을 틀었다.

‘단 한 번의 여행-몽니’


언젠가 호카곶에 간다면 이 노래를 꼭 BGM으로 듣겠다고 맘먹었던 이유는 우연히 봤던 TV 속 한 장면 때문이었다. 일생 연기를 해온 늙은 배우는 ‘내가 언제 또 여길 와보겠는가?’라며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바로 이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다. 인생의 끝자락에 땅끝이라 사람들이 믿어왔던 그 호카곶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노배우의 모습과 음악은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졌다.


<단 한 번의 여행을 하고 있잖아.

너무 많은 짐은 필요 없어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다면

무거워진 너를 버려야 해

때론 넘어져 종일 주저앉아 있겠지!

다시 넌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해>


그 누구든 자신의 인생이 어느 만큼의 길이를 가지게 될지 알지 못한다. 자기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역시 알지 못한다. 백발의 노배우는, 일생을 연기에 바치며 살아왔다. 노인 역할을 하기 위해 더 이상 분장이 필요치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호카곶에 서서 땅끝을 보았을까, 아니면 바다의 시작을 보았을까. 그의 백발이 바람에 날리던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나는 막힌 곳 없는 사방에서 불어대는 바람 속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호카곶에 부는 바람과 햇살, 푸른 파도와 하늘. 그곳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땅끝에 선 채 멀리 바다를 응시하던 노배우의 뒷모습과 이곳이 땅끝이라 믿었던 옛사람들, 그리고 카몽이스의 시구절을 함께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너무 넓어 막막하고, 너무 넓어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호카곶은 땅끝이 된다.

하지만 푸른 바다의 파도를 보며 그 너머를 상상해 보면 또 다른 마음이 든다.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이 푸른 바다 끝에도 또 다른 세상은 있다. 그곳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호카곶은 더 이상 땅끝이 아닌 바다의 시작이 되는 것이 맞다.


나의 여행도 끝나간다. 일상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호카곶을 떠나 신트라역에서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가는 CP 기차의 앞자리엔 나이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가 앉았다. 백발에, 핸드폰으로 구글 지도를 보고 있는 그는 누가 보아도 여행자였다. 에코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로고가 선명했다. 그는 파리지앵일 수도, 파리를 여행하고 온 사람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여러 해 전 파리를 여행했을 때 그 서점에 갔던 일이 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와 서점 오픈을 기다리던 그 파리의 아침을 떠올렸다. 여행자는 이렇게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지의 추억을 만난다. 역시 여행은 끝났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매 순간 끝이 아닌 시작을 보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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