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야마까지의 비행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새벽 7시에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떠올라 일본의 마쓰야마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남편과 둘이 떠난 여행에 챙길 것도 별로 없어 두 사람의 짐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담고도 넉넉하다. 나는 작은 배낭에 노트북과 몇 개의 소품만을 넣었을 뿐이다. 비행기 안에서 가방 속을 뒤적거리다가 여권이 손에 닿았다. 초록색 표지의 내 여권을 펼쳤다. 무심하게 여권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칫,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탈북민 출연자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이 여권을 소지한 대한민국 국민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와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북한에서 살다가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는 한 출연자는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처음 여권을 발급받고 울었다고 했다. 바로 이 문구 때문이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든 나를 보호해 줄 나라가 생겼다는 그 든든함이 감격의 이유라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나와 그들의 북한 탈출기와 대한민국 적응기를 이야기하는 그 프로그램을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그 장면을 보게 된 것인데, 나는 그제야 ‘여권에 그런 문구가 있었다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여권을 찾아 펼쳐봤다. 정말 그 문구가 있었다. 나에겐 그저 여행할 때 필요한 신분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던 여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게나 절실하고 감격스러운 ‘뒷배’가 되기도 한다는 걸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의 여권은 2025년 1월 기준 190개국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며, 이 수치는 세계 2위의 여권파워를 갖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 특별히 비자가 필요했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비자 대신 여행 허가제를 시행하는 나라도 많지만, 비자가 아닌지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허가받는 데에 문제가 없다.
우리나라는 1989년에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말 그대로 업무상의 목적이 아닌 이상 관광으로는 ‘자유화’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거다. 하지만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다고 해서 여권을 발급받는 것도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 자유총연맹 회관의 대강당을 꽉 채운 사람들 속에 앉아 해외에서 지켜야 하는 매너와 안보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 것, 공중도덕을 잘 지켜 한국인으로서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할 것 따위의 다소 위압적이거나,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터지는 기초적인 내용의 교육이었다.
그 여권을 만들어 친구와 둘이 떠난 곳은 일본이었다. 당시 국경을 넘은 장거리 연애를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친구를 꼬드기고, 친구와 함께 간다며 겨우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첫 여권, 첫 해외여행.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던 그 겨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지났다. 국경을 사이에 둔, 이른바 롱디커플은 이제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매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공통의 취미를 가진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뜨자마자 내릴 준비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마쓰야마. 착륙 준비에 들어간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꺼낸 여권을 물끄러미 봤다. 다른 나라로 떠나면 나를 증명하는 건 이 여권뿐이다. 나를 보호해 주는 것도 바로 이 여권뿐이다.
몇 해 전 여권 커버가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아직 내가 쓰고 있는 이 초록색 여권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6월에 발급받았다.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는데 기한이 만료된 여권을 굳이 만들어야 할까? 망설이면서도 나는 여권민원실을 향해 걸었다. 밖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하는 시절이었지만, 6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걷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스크를 벗고 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젠가 팬데믹이 지나고 나면 이처럼 자유롭게 공기를 마시며 걷게 될 것이라는 희망도 품어봤었다.
나의 초록색 여권의 기한은 2031년 6월까지이다. 팬데믹의 암울함 속에서도 페이지 수가 두 배로 많은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지금 내 여권에는 이미 꽤 많은 나라의 입출국 확인 도장이 찍혀있다. 앞으로 내 여권에는 얼마나 많은 도장이 더 찍히게 될까. 이 도장들은 마치 나의 발걸음과도 같다. 어느 날은 빗속을, 또 어느 날은 뜨거운 햇살 아래를 걷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어느 날엔 눈 쌓인 벌판을 걸으며 내 발자국을 남길 수도 있겠다. 그 어떤 여행의 순간도 나는 상상할 수 없고, 짐작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다만, 여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