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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를 먹자!

by 전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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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니 낚시는 일찍 시작해야지, 하며 야심 차게 새벽 네 시에 집을 나섰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기 전, 늘 하던 대로 심호흡을 하고 두 주먹 불끈 쥐어보기도 했다.

물고기 느이들은 다 죽었어!!!

내가 하는 플라이낚시는 주로 강원도의 계곡 이곳저곳에서 한다. 오늘 역시도 목표는 강원도의 계곡이다. 그런데…. 평창쯤 왔을 때였다. 갑자기 싸한 기분이 엄습했다.

계곡에 가까워지면서 머릿속으로 오늘의 낚시를 그림 그리듯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낚싯대는 뱀부로드 3번을 꺼내고, 릴은…. 음…. 그것을 쓰고, 훅은 새로 준비한…. 하다가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집에서 나올 때 가방 안에 릴도, 훅도 다 챙겨 넣었다. 트렁크에 웨이더와 계류화도 있다. 그런데...낚싯대는…? 차 안에 있던...가?


서, 설마…?


노랫말처럼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도 않는 걸까. 설마…. 했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졸음쉼터에 우선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어보니….

하….

손바닥만 한 차 안 어디에도 낚싯대는 없었다. 트렁크 속엔 대충 구겨 넣은 웨이더와 흙 묻은 계류화만 굴러다녔다. 차라리 저것들을 놓고 왔더라면 옷이 물에 젖든 말든 어찌 낚시를 해보기라도 하겠지만, 낚시꾼이 낚싯대를 챙겨오지 않았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트렁크를 닫는 것도 잊은 채 한 오 분쯤 멍하니 서 있다가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새벽의 고속도로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열린 트렁크 앞에서 혼자 실실 웃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차 안에 털썩, 주저앉듯 들어가 앉아 창밖을 봤다. 동해까지 이어지는 새벽의 고속도로엔 간간이 차들이 지나갔다.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 보니 갑자기 내 차의 유리창과 사이드미러에 쌓인 먼지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내 마음처럼 차 유리창도 뿌옇기만 했다.

나는 뭐 하러 알람을 다섯 개나 맞추고 새벽 4시에 뛰쳐나온 것이며, 뭐 하러 그렇게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주유소에서 휘발유도 만땅으로 채워 넣은 것일까. 혼자서 혀를 찼다. 쯧쯧.


낚시꾼은 궁리하기 시작했다.

1 낚싯대 없이 그냥 릴의 낚싯줄만 풀어서 포말에 넣어 볼까. (원시 낚시 체험의 하루로 삼으면 되는 거다)

2 국민 포인트를 찾아가서 누구든 낚시꾼이 오면 낚싯대를 좀 앵벌이 해볼까. (아무리 낚시꾼들이 지나치지 못하는 국민 포인트라고 한들 오늘 같은 평일에 누가 올 확률이나 있을 것이며,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그만큼 넉살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왕 집에서부터 200킬로를 달려왔는데, 여기서 100킬로 더 못 달릴 건 또 뭐냐, 싶은 마음에 목적지를 바꿔 낙산사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 문화유산 스탬프 투어의 도장을 모으고 있는데, 강원도 지역에선 낙산사의 도장 하나만 남겨두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도장하나를 핑계 삼아 예정에 없던 낙산사 투어로 집 나온 목표를 바꾼 것이다. 그래, 원래 인생엔 늘 플랜b가 필요한 법이지, 나름 정신 승리도 해가면서.


낙산사는 상당히 오랜만에 찾았다. 새벽을 겨우 벗어난 이른 아침에 낙산사 경배는 고요만이 감돌았다. 어찌하여 들어선 길이 템플스테이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인 듯싶었는데 이 길이 맞나 싶을 무렵 승복을 입은 신도가 내려오기에 입구를 다시 확인했다.

이 길로 쭉, 옆길로 새지 마시고 길만 따라 올라가시면 해수관음상을 볼 수 있어요. 정말 좋아요. 좋은 날 오셨어요.

그 신도의 말처럼 (쓸데없이) 날씨는 좋고, 불쑥불쑥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주문, 아니 염불을 외워보기도 했다. 도로 아미타불…. 아니, 나무아미타불불불불불불......

다소 오르막이 군데군데 이어졌는데, 평소 같으면 무릎 골절로 핀을 박고 있는 다리 핑계를 대며 꾀를 피웠겠지만, 오늘만큼은 분노의 힘을 추진력 삼아 씩씩하게 올라 해수관음상을 마주했다.

해수관음상과 그 앞의 새파란 동해를 보는 동안 마음은 신기하게 즐거워졌다. 그 신도의 말처럼 좋은 날, 좋은 곳을 찾은 걸까. 물론 우매한 중생은 나뭇가지만 봐도 집에 놓고 온 낚싯대를 떠올리며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말이다.


경내엔 누구나 무료로 차를 마시고 갈 수 있는 차루도 있었다. 2층 누각에 마련된 그 차루에 오르니 이른 아침답게 아무도 없어 넓은 공간을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 누각 건너편에 작게 멀어진 해수관음상을 한동안 바라보다 돌아왔다.

19년 차 낚시 인생에 별일을 다 겪고, 알게 모르게 온갖 주책도 떨어봤지만, 아무래도 여전히 쇼는 진행 중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올 즈음엔 어느새 새벽의 황당함은 멀리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당분간 오메가3를 열심히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물고기를 잡기 전에 정신 줄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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