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랑스식 족발요리

by 전명원


파리로 떠나는 우리 모녀를 못내 불안해한 건 남편보다는 엄마였다. “너희 둘 다 영어도 못 하는데 잘 다녀올 수 있겠니?”라는 걱정으로 시작해 “애기 손 꼭 잡고 다녀라.”라는 신신당부로 끝나는 레퍼토리가 가는 날까지 이어졌다. 스무 살이 무슨 애기냐며, 제 몫을 하는 애와 가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사실 날짜가 다가오며 나 역시 불안했다.


싼 항공권을 찾았던 우리가 이용한 건 핀란드를 거쳐 파리로 가는 핀에어였다. 요정의 나라. 북유럽의 차갑고 쓸쓸한 정서. 이런 것을 상상했으나 막상 도착한 핀란드의 반타공항은 오로지 뭉툭한 주둥이를 가진 만화 캐릭터‘무민’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 반타공항에서 경유하며 이미 유럽 입국심사를 마친 것이니 파리에선 짐만 찾으면 되는 것도 알지 못했던 우리 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파리공항을 나섰다. 내 인생 첫 유럽이었다.


파리 드골공항에서 공항버스 타는 곳을 못 찾아 헤맨 것을 시작으로 숙소까지 찾아오는 길은 험난했다. 기본적인 영어안내판도 없이 사방은 불어 천지였고,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작은 간과 얇은 얼굴 두께를 한 여행자였으니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딸아이는 그저 ‘따라온 자’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어서 숙소를 찾느라 헤매는 도중 이미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감흥을 느낄 새도 없던 첫날이 지나고 다행히 둘째 날부터 우리는 재빠르게 여행자모드를 장착했다. 구글의 힘을 빌려 지하철뿐 아니라 안내방송은커녕 전광판도 없는 시내버스도 잘 갈아타고 다녔다.

매일 식구들은 걱정을 쏟아내며 우리의 생사 확인을 했는데 막상 우리 모녀는 활기찬 여행자였다. 루블의 모나리자 앞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환상을 가진 파리였지만 사는 건 어째 우리나라보다 힘들어 보이냐는 우스갯소리도 하곤 했다. 골목은 아름답지만 지저분했고, 집시들은 사방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내밀며 팔을 잡아끌었는데 나중에는 알아듣거나 말거나 은근슬쩍 한국 욕을 찰지게 박아주는 배짱도 생겼다.

에펠탑 밑에 누워볼 거야. 샹젤리제 거리에선 누텔라 크레페를 먹어야지. 베르사유궁에선 돗자리를 깔고 앉아보자. 이런 소소한 여행자의 꿈은 모두 실현되었다.


우리가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뿐이었다. 조식을 먹자마자 뛰어나가 해질무렵이 되어야 들어왔다. 파리에 볼 것은, 아니 확인할 것은 넘쳐났으니 매일 시간이 아쉬웠다. 여행에선 푸짐하게 잘 먹는다는 사람도 많지만, 돈 계산에 바쁜 여행자는 그렇지도 못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빵집에서 산 바게트를 들고 다니거나, 푸드코트를 찾아다니며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떠나기 전날이었다.

”가기 전에 우리 파리에서 제대로 한 끼를 먹어보자!“

이렇게 말하며 딸과 호기롭게 식당을 찾았다.


내가 원한 건 야외식당의 휜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이었다. “꼭 흰 테이블보가 깔려있어야 해! “그렇게 말하며 기어이 공원 옆으로 넓게 펼쳐진 광장에서 ’흰 테이블보’를 갖춘 야외식당을 찾아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팔에 흰 냅킨을 두른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해 주고, 의자도 빼주었다. 신기하면서도 불편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낯선 마음은 메뉴판을 앞에 놓고는 그만 막막해져 버렸다. 여태까지 다녔던 식당에선 크게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슷비슷한 빵 종류니 대충 찍어도 괜찮았다. 푸드코트에서도 원하는 것을 골라 담아 가져다주면 알아서 계산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 식당은 달랐다. 전채요리로 시작해 메인과 디저트까지 일일이 따로 골라야 하는데 문제는 모두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어 짧은 영어단어 실력으로 찍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황해하는 우리를 눈치채고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를 하나씩 짚어가며 길게 설명을 해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에 더 난감해진 우리는 초집중하며 그의 말에서 하나라도 아는 단어가 튀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런 우리 귀에 와서 박힌 단어는 ’푸아그라‘였다. “그거요! 그거!” 난데없이 튀어나온 한국말을 눈치로 알아챈 건 역시 그였다.

이제 또 하나의 메인을 고를 차례였다. 그는 또다시 메뉴 설명을 시작하고, 우리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다시 집중했다. 그의 말 중에 ’비프‘를 알아들은 내가 또다시 ”그거요! “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반응이 달랐다. 끝이 아닌 듯 설명을 길게 더 붙였는데 이해할 수 없던 우리는 ’비프면 고기 아냐?‘ 이런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자 답답해하던 그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자기 왼쪽 손목을 턱, 잡았다. 그리곤 어쩌고저쩌고 ’비프‘소리를 연신 했다. ’비프라며...‘ 하는 얼굴로 우리가 끄덕끄덕하자 우리가 이해한 것으로 안 그는 그제야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고는 서빙을 시작했다.


그날의 야외식사에서 어떤 전채요리가 나왔고, 어떤 디저트가 나왔던가는 잊었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푸아그라에 대한 환상이 바사삭 깨졌다는 것이다. 바게트에 발라먹으라는 푸아그라는 말도 못 하게 짜고 비렸다. 이런 음식을 왜 돈 주고 사 먹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그저 체험비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바로 그 문제의 ’비프‘였다. 그 비프요리가 나온 후에야 우리는 종업원의 제스처를 이해했다. 자기 오른손으로 왼손을 턱 잡던 그 제스처가 얼마나 간단명료하게 이 요리를 한방에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 요리는 ’족발‘이었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광장의 야외식당에 앉아 짜고 비린 푸아그라와 우리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기름 덩어리처럼 느끼한 프랑스의 족발을 먹었다. 흰 테이블보에 바게트 부스러기를 흘리기도 하고, 프랑스 족발에서 나온 발가락뼈들을 떨어뜨리며 킥킥 웃기도 했다. 메뉴선택은 대실패였지만, 맛이 있냐고 묻는 종업원에겐 ”엄청 맛있다”라는 인사성 발언도 날려주었다. 결국 우리는 꽤 비싼 음식이었지만 반도 못 먹은 채 남기고 나오며 그가 ’비프‘뒤에 그리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를 말리고 싶어서였을 것이고, 엄지척했던 이유는 우리의 도전 정신을 높이 산 때문이었을 거라며 배꼽을 잡았다.


생각해 보면 이미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사이 나는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 물론 십 년이 지났다고 해서 부자인 여행자가 된 것도 아니라 여전히 나는 빵 쪼가리나 패스트푸드, 혹은 가져간 누룽지 같은 것으로 한 끼 때우는 일이 많다. 하지만 가끔 그날의 프랑스식 족발을 떠올리곤 한다.

돌바닥의 넓은 광장 가운데에 흰 테이블보를 두른 식당. 유럽 사람들이 족발을 먹는다는 것도 몰랐던 여행자를 답답해하면서도 끝까지 설명하느라 애를 쓰던 점잖은 종업원. 비리고 기름져서 결국은 다 먹지도 못한 그날의 프랑스식 족발 요리.

어느 날은 ”우리 것이 최고지“하며 배달받은 족발의 살점을 야무지게 발라먹고, 또 어느 날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껏 무심함을 가장한 채 ”프랑스 족발은 말이야...“ 라고, 슬쩍 잘난 척을 해보기도 한다.

여행은 그렇게 남았다.

어쩌면 여행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여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