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하면서

by 전명원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가. 흰머리는 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살았지만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언젠가부터 내 머리에도 새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새치가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로 흰머리가 늘어났다. 석 달에 한 번쯤 하던 염색을, 이제 두 달에 한 번 한다. 두 달에 한 번 염색한다고 해서 두 달 내내 마음이 편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귀밑머리만큼은 염색하고 한 달도 안 되어 희끗희끗하게 몇 가닥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차라리 뒤통수에 흰머리가 먼저 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일단 내 눈에 안 보이면 마음은 편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귀밑머리는 매일 아침 눈에 띄었다.

집 앞에 염색만 전문으로 하는 삽에서 가끔 염색을 했다. 원장은 좋게 말하면 명랑했고, 다소 흠을 잡자면 피곤할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전 어른들 말씀이 온 동네 소문은 미용실에서 다 퍼져나가는 법이라더니 그 말이 이해될 정도의 입담이었다. 가끔은 모른척하고 자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늘 네이버 예약을 하고 방문했는데 어느 날인가 약속 시간이 되어 갔더니 가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전화를 하니 불 꺼진 매장 안에서 전화가 울렸다.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에도 계속 가게 문은 닫혀있었다. 처음엔 신의 없는 주인을 탓하다가,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나 했다. 가게 문은 계속 닫혀있었지만 이제 영업을 접는가보다 생각했을 뿐 남의 일이라 잊었다.

염색은 혼자 약을 사다가 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돈도 굳고 나쁘지 않군. 내심 잘되었다 싶기도 했다. 오래 문이 닫혀있던 가게는 어느 날인가부터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상호의 간판도 다시 내걸었다.


내가 혼자 염색하는 것은 싸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좋았지만 나쁜 점 역시 있었다. 첫째 전문가의 손길이 아쉬웠다. 꼼꼼히 바르기 힘들고, 머릿결도 푸석푸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귀밑머리가 희끗거리는 것도 샵에 가서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주기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시 돈을 들여야 하는 걸까 하면서도 망설였다.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다면 사지 않는다는 건 내가 돈을 쓰는 원칙 중 하나이다. 염색을 하는 것에도 그 기준을 적용한다면 샵에 갈 일이 아니라 집에서 몇천 원짜리 염색약을 사다가 바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희끗희끗 올라오는 흰머리 앞에 나 역시도 돈을 아끼는 것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쪽을 택했다. 이른바 금융 치료다. 다시 염색을 예약했다.


평소 나는 사람 눈이 참 어둡다. 예전에 몇 번 염색을 맡긴 원장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리 두 해쯤 발길을 끊었다고 해도 이리 사람 얼굴 알아보는 일에 자신이 없다니 싶어 남몰래 흘끔흘끔 봤지만 아무래도 같은 사람인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말이 많았고, 마치 오래 알아 온 사람처럼 나를 대하는지라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두세 번 더 염색하러 다니는 동안 내내 품고 있으면서도 차마 묻지 못했던 나의 궁금증은 결국 다른 손님이 풀어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와서 머리 염색을 하던 손님 중 한 분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여러 잔 사다가 돌렸다.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 있다가 얼결에 낯선 이에게 음료까지 얻어 마시고 뻘쭘해 있었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끊임없이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퇴직을 앞두고 몽골 여행을 준비한다며 여행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몇 달 전 태국을 다녀왔는데 다음 달엔 몽골에 가게 되었다며 이렇게 여행을 자주 다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손님 말을 원장이 받았다. 무슨 소리냐. 몽골이 좋다더라. 좋다는 데는 다 가봐야 한다. 그리고 친정엄마가 몽골에 다녀왔는데 반드시 캐시미어를 사와야 한다며 거들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기운 있을 때 부지런히 다녀. 더 늙으면 가고 싶어도 못가.”

그 말에 다들 웃음이 터지고 맞장구를 쳤다. 얼결에 그들이 손에 쥐여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안 듣는 척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그 말에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났다. 몽골에선 캐시미어란 말이지, 하며 속으로 기억해 두기도 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에 단골인 듯한 한 여자가 원장에게 말했다.

“근데 말이에요, 예전 사장님은 이거 관두고 지금 뭐 해?”


열심히 손님의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던 원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려 다소 개운한 맘이었는데 이어지는 원장의 말은 무거웠다.

“그 언니 떠난 지 이제 일 년 다 되어 가요. 멀쩡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혈액암이 와서 가게 문 닫고 고생하다가 금방 갔어요.”

원장은 말하면서도 일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원장이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봐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지금 건강한 거 믿지 마세요. 언제까지 건강할지 누가 알아. 내일이 어딨어. 지금 가고 싶은데 다 가요. 태국도 가고, 몽골도 가요. 갈 수 있을 때 다 가고, 할 수 있을 때 다 해.”

그 말에 다들 맞장구를 쳤는데, 뒤에 원장이 한마디 덧붙인 말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나도 가고 싶다, 몽골! 근데 나는 대체 언제 노냐고. 맨날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염색만 해도 한결 다른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달에 한 번씩 이렇게 염색을 해야한다는 나에게 원장이 해준 말이 다시 떠올랐다. 두 달에 한 번이면 아직 양호한 거예요.

그렇다. 어느 날엔가는 두 달에 한 번 염색하던 오늘이 그리워지겠지. 아니, 염색하던 날이 그리워질 날도 오겠지.

살짝 덜 마른 머리는 집으로 향하는 그 몇 걸음 사이에 바싹 말랐다.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고, 지금은 이처럼 태양이 뜨거운 한여름이다. 중요한건 두달 후 다시 염색을 해야하는 내 흰머리가 아니라 지금은 머리위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역시 ‘지금’보다 중요한건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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