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남미로 시집갔어요!”
타던 차를 중고로 판매하는 조건으로 새로 차를 바꾸었는데 그 행방을 궁금해하는 걸 눈치챈 영업사원이 내게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가 타던 차는 ‘티코’였다. 우리 티코, 멀리 갔구나. 나는 중고차들이 가득 실린 컨테이너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을 우리의 빨간 티코를 생각했다. 애틋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마음이었다.
티코는 이제 기억하는 이도 드물어진 대우자동차의 경차이다. 나는 지금도 차라면 그저 잔고장 없이 굴러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고 앞에 안전한 차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당시 우리 형편에 자가용은 꽤 욕심을 내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결혼한 이후 최대 목표인 내 집 장만을 달성하고 나니 난생처음 빚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매달 은행에 내야 하는 대출이자가 부담이긴 했어도, 아이가 태어나자 역시 차는 필요했다.
쪼들리는 신혼부부가 차를 장만하는 것에 선택지가 넓었을 리 없다. 그래서 티코는 우리 가족의 첫 자가용이 되었다. 빨간색의 몸체에, 아랫부분에는 은색 띠를 두른 우리의 첫 귀염둥이 티코. 우리에겐 참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는데 막상 세간에는 티코를 우스개로 삼는 말들이 많았다.
뒤로 당겼다 놓으면 앞으로 튕겨 나간다더라. 티코 운전자는 왼손에 장갑을 끼고 있다가 코너링할 때 도로를 짚어야 한다더라. 심지어 티코는 도로에 붙은 껌을 밟았다간 앞으로 못 나간다는 말에, 주차할 때는 두 명이 번쩍 들어서 옮기면 된다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몇 해 동안 티코를 잘 타고 다녔다. 평일이면 남편의 출퇴근 차로, 주말이면 수원의 친정에 오가느라 고속도로를 씩씩하게 달렸다. 키가 큰 남편은 티코 운전석에 앉으면 정수리가 닿을락 말락 했는데 그 덕에 운전석 천장에는 늘 남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몇 해가 지나 자동차를 새로 바꾸며 우리의 빨간 티코를 보내던 날, 운전석 천정에 붙은 남편의 머리카락을 떼고, 타이어도 돌아가며 살피곤 궁둥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마웠어. 달리는 차는 타는 사람과 운명공동체이며, 목숨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헤어짐이 더욱 애틋했다.
우리의 빨간 티코와 이별한 이후 차는 몇 번 더 바뀌었다. 새 차 카탈로그를 들여다볼 때마다 고민했다. 눈에는 우리의 첫차인 빨간 티코처럼 강렬한 색이 멋져 보였지만 막상 선택한 것은 늘 흰색이거나 회색 계열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하곤 했다. 그때 우리는 선뜻 빨간 차를 선택할 정도로 젊었던 걸까. 지금도 빨간 차가 눈에는 예뻐 보이지만 막상 선택할 용기는 나지 않는데 말이다.
우리의 티코가 남미로 시집가고 몇 해가 지나서 우연히 노래를 들었다.
<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위로 / 날으는 마법 융단을 타고 / 이렇게 멋진 초록 바닷속을
달리는 빨간 자동차를 타고 / 이렇게 멋진 푸른 세상 속을 / 나르는 마법 융단을 타고
이렇게 멋진 장밋빛 인생을 / 당신과 나와 우리 둘이 함께 >
자우림의 ‘매직카펫라이드’였다. 나는 이 노래를 한동안 매일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왜 노래방에 가서 돈을 주고 노래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노래방에 가는 날이면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말하자면 이 노래는 나의 18번인 거다.
< 신경 쓰지 마요 그렇고 그런 얘기들 / 골치 아픈 일은 내일로 미뤄 버려요 / 인생은 한 번뿐 후회하지 마요 / 진짜로 가지고 싶은 걸 가져요>
물론 이 노래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다른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하지 말고 진짜로 갖고 싶은 걸 가지라는 이 부분 말이다. 누구나 품고 있는 말이지만 실행은 쉽지 않은 이 부분이 나는 참 좋았다.
멋진 파란 하늘 위로 마법 융단을 타고 날며, 초록 바닷속으로 빨간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는 부분에선 가끔 우리의 빨간 티코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장면에선 빨간 스포츠카 정도는 상상해야 좀 멋지겠지만, 역시 나에겐 타보지 않은 스포츠카보단 익숙한 티코가 먼저인 걸까.
이제 티코가 단종된 지는 꽤 되었다. 도로에선 가끔 아주 오래된 자동차들을 보기도 하는데 우리의 티코는 더 이상 도로에서도 만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남편과 나는 가끔 우리의 첫차 빨간 티코 이야기를 한다.
운전석에 머리가 닿았어. 폭우라도 오는 날이면 양철지붕에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었지. 이런 말을 하며 웃는다.
기름 냄새만 맡아도 가고, 세금도 적게 나오고 진짜 기특한 녀석이었는데. 주차는 또 어떻고, 다른 차들 다 못 들어가도 우리 티코는 들어갈 수 있었다니까. 이런 말을 하며 잠깐 자랑스러운 얼굴이 된다.
그러다가 지나가듯 “은퇴하고 나면 경차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젊은이였던 우리가, 어느새 은퇴를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빨간 티코를 타던 그 시절에서부터 참 멀리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란 하늘 위를 날고, 초록 바닷속을 달리는 시간이다. 여전히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렇기에 후회 없이 갖고 싶은 걸 가져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마법 융단을 타고, 이렇게 멋진 세상 속을 달리며 장밋빛 인생’을 만들어 가보기로 한다. 아, 빨간 자동차를 상상하는 부분에선 여전히 우리의 티코를 먼저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역시 꿈만큼이나 지나온 추억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된 세월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