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라니. 어린 시절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던 엄마는, 딸들을 음대나 미대를 보내고 싶은 꿈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미술도, 음악도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미술이라면 실기 점수가 바닥을 쳤고, 음악이라면 노래 부르기부터 악기 다루는 것까지 모두 리듬과 박자를 타지 못했다.
소질이 없는 걸 엄마도 모르지 않으셨겠지만, 끈을 놓지 못하신 덕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그 지겨운 피아노를 치러 다녀야 했다. 강약 조절도 안 되고, 리듬도 타지 못하며, 악보 외우기만 달인이었던지라 모든 박자는 제 길이보다 죄다 빨라져서 늘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모나미 볼펜으로 손가락을 탁탁, 치며 “또 또 또! 또 빨라진다!”라고 혀를 차는 건 선생님의 단골멘트였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어서야 현실을 직시한 엄마의 포기 덕에 나는 피아노에서 놓여났다. 검은색 호루겔 피아노는 한때 우리 삼 형제가 번갈아 가면서 쳤지만 언젠가부터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다가 10만 원의 웃돈을 주고 피아노 수거업자의 트럭에 실려 보냈다.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가는 걸 내다보며 마음이 좋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피아노를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도 했다.
세월이 더 많이 지난 언제인가부터 피아노가 다시 치고 싶어졌다. 피아노라니. 그 지겹던 피아노라니.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살아온 시간이 많아진 것이니 그만큼 경험이 쌓이고, 추억이 쌓이는 일이다. 동시에 다소 조바심이 나기도 하는 일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또다시 용기를 낼 수 없을지도 몰라. 지금이 아니라면 가보지 못할지도 몰라. 지금이 아니라면 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이런 마음으로 나는 언제인가부터 오카리나도 배우고, 민화도 배운다. 책을 만드는 일을 배우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또 가르치기도 한다. 짬을 내서 여행을 떠나고, 매일 책을 읽기도 한다.
젊은 시절엔 돈이 되는 일이 우선이었지만, 이제 돈이 되지 않아도 크게 비용이 드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시도해 보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일은 때로 서글프고, 때로 겁이 나지만 때로는 이렇게 용감해지고 여유를 누릴 줄도 알게 되니 모두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이곳저곳 검색을 했다. 일주일에 하루만 배우고 싶었고, 은퇴자에게 부담되는 수강료는 아니었으면 했다. 그리고 요즘 많이 하는 디지털 피아노가 아닌, 내가 예전에 쳤던 것 같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원했다. 구하면 얻어진다 했던가. 이 모든 조건을 거의 충족하는 강좌를 찾아냈다.
수원체육문화센터엔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피아노 수업이 있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했다. “유레카!”를 외치며 등록했다.
첫 수업 시간, 피아노 앞에 앉은 마음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처럼 제대로 피아노 앞에 앉아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초등학교 시절 체르니 40을 치던 그 이후로는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강사님은 내게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물었다. 나처럼 나이 든 수강생은 대부분 반주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몇십 년이 흘러 이제 다 잊었지만, 심지어 이제 악보 보는 법도 가물거릴 지경이지만 가능하다면 어린 시절에 배웠던 곡들을 다시 쳐보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이 펼치신 악보는 소나타 13번이었다. 아, 읽을 줄 안다고 칠 줄 아는 건 아닌데, 싶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보다 용기를 냈다. 건반 위의 손가락에 힘을 주니 경쾌한 피아노 음이 울려 퍼졌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어느 날 오후, 피아노 앞에 앉은 십 대 소녀가 되어 나는 정말 오랜만에 소나타 13번을 쳤다. 당연히 박자도 맞지 않고, 음표도 헷갈려서 몇 번이나 끊기고 버벅댄 끝에 겨우 쳤다. 리듬은 고사하고 예전엔 그리도 빠르기만 하다고 지적을 받았던 박자는 이제 따라가기도 벅차서 자꾸 느려졌다. 하지만 그 첫 곡을 칠 때의 환희란 내가 피아노를 치며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제 나는 매주 화요일 오후면 피아노를 치러 간다. 모든 조건이 다 다 맞았지만 단 하나, 도보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감수하기로 했다. 피아노 수업이 있는 수원 체육문화센터로 가는 길엔 몇 해 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부모님이 마지막 머물렀던 장례식장 앞을 지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 동안 나는 그 앞을 지나지 못했다. 그리웠고, 마음이 아파서였다. 하지만 살아보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맞았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가끔 그 앞을 지나며 아련하게 그곳을 올려다보곤 한다.
여전히 아리지만 매주 화요일 오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부모님께 인사를 건넨다. “저 피아노 치러 가요!” 아마도 엄마는 혀를 차고 계실 것이다. “으이구, 치랄 때는 안치고!”
하지만 오십후반을 달려가는 딸이 이제는 예전과 달리 즐겁게 피아노를 치러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실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뒤통수에 대고 어릴 때처럼 한마디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일찍 가서 많이 치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