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김치를 얻었다. “이런 거 안 하실 것 같아서….”라며 건네주신 김치통이 무려 두 통이었다. 거기에 햇곡식이니 같이 맛보라며 커다란 비닐봉지도 얹어주셨는데 ‘조금’이라는 말씀과는 달리 묵직했다. 김치도 맛보기 수준이 아닌데 싶어 이걸 다 받아도 되는 건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내 손엔 커다란 김치통 두 개와 곡식이 든 봉지가 들려있었다.
집에 돌아와 김치통을 여니 빛깔 고운 김장 김치가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김치라는 것이 뚝딱하고 쉽게 만들어지는 음식도 아니고, 그 준비 과정부터 얼마나 손이 많이 갈지는 김치를 담가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 채로 조금 잘라 길게 찢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아직 익지 않은 배추김치의 푸릇푸릇한 싱싱함이 입안에 가득 찼다.
엄마는 아파 눕기 전까지는 매해 김치를 담갔다. 김치만큼은 못 사 먹겠어, 라고 했다. 우리 형제들이 성인이 되어 모두 집을 떠나고 두 분만의 단출한 살림이 된 이후에도 그랬다. 이제 식구가 없어 김장할 일도 없다면서도 매해 김장철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대여섯 포기라도 김치를 담갔다. 엄마에게 김장이란 그저 김치를 담그는 행위가 아닌, 어떠한 삶의 절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담근 김치는 매번 내게로도 왔다. 철딱서니 없는 내가 배추김치 써는 것도 귀찮으니 그냥 다 썰어서 만들어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엄마는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김치란 모름지기 썰어서 담그면 맛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포기김치를 일일이 가지런히 썰어서 통에 담아 주었다. 엄마의 김치는 그처럼 내게 당연했고, 화수분처럼 말만 하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김장이라는 건 나와 참 멀고도 먼 단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여덟 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김치 유목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치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거나, 예민한 미각의 소유자라 김치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거나 하지는 않다. 그저 대충 먹고, 웬만하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억하는 맛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어떤 김치를 사 먹든 늘 비교 대상은 엄마의 김치다. 어떤 김치는 엄마 김치보다 짰고, 또 어떤 김치는 엄마 김치와 달리 아무리 익혀도 풋내가 났다. 여전히 김치써는 것이 귀찮은 나는, 다 썰어서 담근 맛김치를 주로 산다. 그리고 ‘김치는 썰어서 담그면 맛이 없다’는 엄마 말을 떠올린다. 맛도 맛이지만, 볼품이 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김치를 썰어서까지 보내줄 엄마는 없다.
“김장 김치 참 오랜만이다.”
난데없이 김장 김치를 얻어왔다는 말에 김치통을 열어보며 남편이 말했다.
“그렇지? 엄마가 없으니까 이제 김장 김치를 얻어먹을 일도 없어.”
김장 김치가 든 통을 열어 둘이 머리를 맞대고 들여다봤다. 무언가 아주 오래되고 소중한 어떤 것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아련해졌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속엔 참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음식, 체온, 냄새, 소리….
이처럼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두고 온 것들은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뿐이다. 언젠가 내가 놓고 갈 것들도 결국은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어떤 것을 나누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