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안풀리는 날
그런 날이 있다. 10 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30 보가 걸리고 평평한 평지인데도 가파른 언덕같이 느껴지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런 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날씨도 우중충하다. 잠을 못 잔 것도 아닌데 몸도 어딘가 찌뿌둥한 것 같다. 무언가 크게 문제가 있는 날은 아니지만, 몸에 안 맞는 무겁고 큰 코트를 입은 사람처럼 느릿느릿해지는 날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날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던 일들을 제쳐두고(아무것도 하기 싫었나 보다.) 무겁고 무거운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한 깊게 들어갔다.
‘그래, 오늘 너무 힘든 날이다. 조금 우울한 것 같기도. 공부도 안되고 일도 안 되는구나. 그래 내가 그럼 그렇지.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그 일 때문에 내가 지금 힘든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인해 나는 자꾸만 미끄러지듯이 뒤로 후퇴하는 기분이 들었다. 뒤로 후퇴하면 다음날은 후퇴한 만큼 앞으로 가야 한다. 한발 후퇴 한발 전진. 나는 그렇게 나아가면 뒤로 가고, 뒤로 가면 나아가며 거의 한 자리에서만 머물렀던 것 같다.
인생을 크게 보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괜찮다. 왔다 갔다 하며 성숙해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뒤로 가면 다시 앞으로 가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리적인 상황이야 얼마든지 더 좋은 상황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마음을 다시 잘 닦아서 곱게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리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며 생긴 나만의 꿀팁이 있다. 바로 ‘그대로 있기‘다.
‘그대로 있기‘는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다. 후퇴도 아니고 전진도 아닌 ‘그대로 있기‘는 잠깐 멈춰 서서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번 파악해 볼 수 있다. 무거운 생각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막아버리는 안전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대로 있기‘를 하는 방법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로는 하루 끝 맥주 기다리기다. 두 번째는 말을 일부러 아끼기다. 마지막으로는 내 마음 같지 않게 은은한 미소 띠기다.
이 방법이 꽤 효과적인 게, 하루 끝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는 나를 상상하면 살짝 기분이 시원해진다. (대신 딱 한 캔 만이다.) 그러고서는 최대한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어두운 색일 때 내가 뱉는 말들도 어둡다. 어두운 말들을 밖으로 꺼내버리면 나의 마음은 더 어두워진다. 마지막으로 억지로라도 표정 관리하기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살짝 입꼬리라도 올리고 있으면 마음이 뚝뚝 떨어지려고 할 때 입꼬리가 어떻게든 잡고 버텨준다.
그리고 밤 10시. 나의 하루가 드디어 마무리 단계다. 문단속도 다 하고 빨래도 다 갰다. 스트레칭도 했다. 천천히 냉장고로 가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음- 내 마음 힘들다고 힘든 말들 막 내뱉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 캬-. 힘겹게 잡고 있던 입꼬리도 이제야 놓아준다.
오늘 하루 후퇴대신 잠깐 타임! 을 외친 나를 스스로 칭찬한다. 정말 잘했다. 이 정도면 마음 같아선 전진이나 다름없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곱다. 같이 한 잔 해주는 남편도 고맙다.
세상 삼라만상인데 어떻게 내가 원하는 날들만 있을까. 너무 기뻐 달리기 하는 날도 있고 나무늘보처럼 잠만 자고 싶은 날도 있다. 오늘의 색은 갈색이었지만 내일은 노란색이 섞인 연갈색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래는 흰색이 더 섞여 베이지가 되어있지 않을까. 매일 매일 조금씩 다른 날들, 참 재밌는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