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4
영남고등기술학교 2학년이 된 연이는 그해 봄,
골목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였다.
하얀 얼굴에 갈색 머리칼은
햇살을 받으면 유난히 더 환해 보였다.
잘 사는 집 딸이라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투박한 교복을 입고도
어딘가 다른 느낌의 연이었다.
가는 손가락들, 정갈한 손톱, 뽀얀 얼굴.
고등기술학교에 다닌다는 건
많은 아이들에게는 신기함이었다.
"연이, 미용실 하는 거 맞나?"
아이들이 물었고, 연이는 그저 웃었다.
"응. 머리 예쁘게 해주는 기술 배우는 거야."
돈이 되는 기술. 실력이 있으면
혼자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기술.
그게 미용이었다.
1961년 봄.
연이가 학교에 가려고 골목을 나설 때마다,
마치 우연처럼 누군가 나타났다.
철이오빠는 키도 크고 잘생긴 편이다.
헤진 옷과 오래된 신발은
오빠의 미모를 가리지 못했다.
언제나 그 골목길에서 나타나는
철이오빠가 연이는 싫지 않았다.
"어데 가노?"
"학교."
"그래. 나도 그쪽 가는데, 같이 가자."
오빠는 그렇게 매일 아침 그자리에 서있었다.
골목을 나서면 시장골목을 지나
학교까지는 15분 정도였다.
철이는 연이의 옆에 섰다.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었다.
연이가 좋다고 쪽지를 주고 간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매일 옆을 지켜준 사람은 없었다.
연은 그런 철이의 모습이 점점 좋아졌다.
"요즘 뭐 배우노?"
"파마. 어렵드라."
"그래도 잘 배우제?"
"그런대로..."
말은 적었지만, 철이의 눈빛은
늘 연이 곁에 머물렀다.
가끔은 연의 짐을 들어주고, 길을 비켜주고,
자연스럽게 바깥쪽을 걸어주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다르게,
늘 그 골목에서 나타나는
철이의 모습에 연이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학교 정문에 가까워지면, 철이는 멈췄다.
"이제 들어가라~."
"오빠는...?"
"나? 난 내 학교 가야지."
철이는 웃었다.
그 웃음이 왜인지 슬픈 것 같았다.
"열심히 배워라. 그 손가락들로
많은 사람들을 예쁘게 해줄 거야."
학교에서 나오면,
어느새 연이는 철이를 찾기 시작했다.
철이가 있는 날도 있고, 없을 날도 있었지만,
혼자 걸어오는 날은 다리가 유난히 더 무거웠다.
"어데 보노?"
동네 언니가 물었다.
"아무데도 안 본다."
골목의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곳.
어린 연이가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이제 16살 연이는 그 자리에서 철이를 기다렸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기다렸다.
"연아, 뭐 하노?"
"그냥... 있어."
철이를 기다리고 있던 연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아닌척 시치미를 뗐다.
첫사랑이 뭔지도 몰랐던 연이.
하지만 골목 끝에 그가 나타나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봄, 아버지가 또 방문했다.
용돈을 챙겨주고, 학비를 내주고,
"열심히 해라. 이 기술로 잘 먹고 살 거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는 또 떠났다.
아버지가 떠난 골목길에 허전함 뿐이었던 연은,
이제 철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항상 그 골목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철이.
고등기술학교 2학년의 봄은 유난히 길었다.
마네킹 머리로 파마 연습을 하고,
손가락이 까지도록 세트를 연습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철이를 기다렸다.
"오빠가 오늘도 올까?"
매일 같은 질문이었다. 매일 같은 설렘이었다.
연이는 아직 몰랐다.
그 설렘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지.
첫사랑이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길 것인지.
1961년 그 골목.
햇살이 잘 드는 그곳에서 16살의 연이는
17살의 철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고,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설레어하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그런 설렘.